흐르는 강물처럼

정신없이 일을 하다가 수연은 문득 고개를 들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뜨거운 태양아래 눈이 시릴 만큼 푸른 하늘이 하나 가득 창으로 들어 온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다.

 

어느덧 8월이다.

수연은 두 팔을 엑스자로 교차해서 시려오는 어깨를 주무른다.

보나마나 사무실 온도는 73도에 맞춰져 있을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더운 것을 못 참는 것 같다. 여름엔 늘 이렇듯 온도가 낮다.

으~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다니까.

허벅지를 덮는 두꺼운 쉐타를 입고 있어도 늘 이렇듯 온몸이 으실으실 떨리고 어깨와 발이 시리다.

아무래도 작은 히터를 하나 사다 놔야겠네......

수연은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발을 주무른다. 부드러운 가죽구두 속에 담겨 있던 발이었지만 차기가 얼음같다.

털신도 한 켤레 사다 놓을까......

몸이 추운 만큼 수연은 지금 마음도 춥다.

수연은 고개를 빼 늘 쟌이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본다. 그러나 그 자리는 비어 있다. 그는 석달 전 다른 자리로 옮겨 갔다. 탁월하고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 다른 부서로 승진되어 간 것이다. 그게 지난 6월 초였다.

에이미가 다녀간 그 날밤 이 후로부터 수연은 쟌과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쟌이 급작스레 다른 부서로 이동한 탓도 있지만 수연이 쟌을 의식적으로 피한 까닭이다. 수연은 점심을 같이 먹자는 쟌의 전화와 이 메일을 모두 거절했다. 어쩌다가 휴게실이나 복도에서 쟌을 맞닥뜨릴 때가 있긴 했지만 그럴 때마다 수연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황급하게 그 자리를 빠져 나오곤했다. 자신의 뒷모습을 쫒는 쟌의 눈길을 아프게 느끼면서.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쟌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단호하게 끊어내야 하는 것이다. 더 큰 일이 생기기 전에.

"오늘도 점심먹으러 안 나갈 거니?"

옆자리의 중국인 동료가 지나가다가 수연을 보고 묻는다. 벌써 점심시간이 되었나. 수연은 컴퓨터 하단에 찍히는 시계를 보았다. 열 두시하고도 7분이다.

"으응......"

수연은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인다. 최근 몇 달동안 환하게 웃어본 지가 언제인가 생각하면서. 안개처럼 그녀의 가슴을 온통 뒤덮고 있는 쟌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녀는 예전처럼 밝은 미소가 지어지 않는 것이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밝은 미소가.

"살 뺀다고 했쟎아......"

"더 뺄 것도 없는 살이구만........."

번민과 고뇌때문인지 수연은 요 몇 달동안 입맛도 잃었고 깊은 잠을 거의 못잤다. 그래서 살이 서너파운드 빠졌다.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의 허리가 헐렁헐렁하다. 처음 샀을 때는 딱 맞았던 짙은 감색 원피스가 말이다.

중국인 동료는 더 이상 묻지않고 어깨를 으쓱하며 수연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녀의 뒷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수연은 쟈켓을 챙겨들었다. 수면실에가서 낮잠을 잘 생각인 것이다. 회사내엔 직원들을 위해 마련한 수면실이 있었다. 채광을 최대한 약하게 해놓은 수면실에는 푹신한 의자가 세 개 있었다. 그러나 그 수면실은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를 출산한 후 일 하러 온 여자들이 불은 젖을 짜내기 위해 가끔 이용할 뿐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다.

최근 얼마동안 수연은 수면실에 가서 낮잠을 자는 걸로 한 시간의 점심시간을 대신했다. 에이미 및 쟌과 마주치는 걸 피하기 위해서였다.

회사 주위에 있는 식당이 뻔한지라 나가기만 하면 보게 되는 것이다. 동료들과 함께 나온 쟌을 보거나 동료들과 함께 나온 에이미, 그렇지 않으면 쟌과 에이미가 나란히 같이 앉아 있는 모습을.

에이미와 쟌이 나란히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의 쓰라인 기분을 수연은 아직도 기억한다. 선혈이 뚝뚝 흐르는 깊은 상처에 굵은 소금이 뿌려지는 것 같던 그 쓰라린 아픔을.

도로 돌아나오기도 그렇고 그들에게 아는 체를 하기도 그래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수연을 발견하고 쫒아나온 건 에이미였었다.

"언니, 저기로 가서 같이 앉아"

거절하면 사람 꼴이 더 우스워질 것 같아 지옥에 끌려가는 심경으로 수연은 에이미에게 팔을 이끌려 쟌이 앉아 있는 테이블로 갔었다. 쟌은 수연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깊고 서늘한 눈으로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을 뿐.

도시락을 싸와서 휴게실에 갔을 때도 수연은 둘을 마주쳤다. 수연이 가는 데는 항상 그들이 있었다. 수연은 더 이상 점심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다.

점심같은 건 안 먹어도 돼, 점점 나오는 똥배를 생각하면.......

그래서 수면실에 가서 낮잠을 자는 걸로 점심시간을 대신한 것이다. 나중에 배가 고프면 비스켓 서너개로 때우면서.

수연은 수면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아주 약한 촉수의 작은 전등 네 개만 천정 가장자리에 달려 있어 수면실 안은 침침했다. 수연은 놓여 있는 세 개의 의자중 가장 벽 쪽에 놓인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의자를 최대한 뒤로 젖혀 몸을 눕히고 쟈켓을 가슴에 덮었다. 몸이 빨려들어 갈 것 같은 푹신한 의자의 감촉이 등뒤로 전해졌다.

어젯 밤도 수연은 잠을 설쳤다. 온갖 잡생각이 수연의 머리를 괴롭혔다. 딱히 쟌 생각만이 아닌 온갖 어지러운 생각.

한 십여 분만 이대로 가만히 누워 있으면 잠에 빠질 것 같은 기분에 수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어머니 자궁속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편안하게 이완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연은 이내 눈을 번쩍 뜨면서 버릇처럼 왼쪽 팔을 들어 시계를 본다.

지금 쯤 쟌과 에이미는 점심을 먹으러 나갔겠지. 둘이서만......나를 빼놓고....

편안하던 가슴에 금방 차가운 바람이 휘이익 인다.

그리고 어쩌면 에이미는 어디서 무엇을 먹고 왔다고 또 이 메일을 보내오겠지?

굳이 그러지않아도 되는데 에이미는 쟌과의 관계 진행사항을 시시콜콜 수연에게 보고했다. 이 메일일 때도 있었고 전화일 때도 있었다.

-언니. 아까 낮에 오랜만에 패스트 푸드점에 쟌이랑 같이 갔었어.

-어젯밤은 늦게까지 쟌이랑 같이 있었어, 언니. 저녁을 같이 먹고 영화를 보러갔었거든.

- 오늘은 쟌이 너무 바빠서 점심을 같이 못먹는다고 했어, 나 혼자 나갔다가 오는 길에 중국음식을 투고해서 갖다주었지.

그렇게 일거수 일투족 보고 하는 중에 가장 많은 부문을 차지하는 것은 역시 점심을 같이 먹으러 나갔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보고 받을 때마다 수연의 가슴은 말도 못하게 아프고 쓰라렸다.

제발, 제발 에이미야 그만, 그만 좀 하렴. 니네 둘이 잘 나간다는 이야기 듣는 거, 진짜로 참기 힘들어....

그러나 수연은 대놓고 그렇게 말 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잘 되길 도와주겠다고 분명히 약속했으니까.

-그래? 참 재미있었겠구나...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을 하는 수연은 가슴속으로 피를 철철 흘리는 것이다.

에이미는 진짜로 나를 친 언니같이 생각하는 것일까. 그래서 나를 믿고 온갖 이야기들을 다 해오는 것일까. 아니야. 어쩌면 일부러 시위하기 위해 그러는지 몰라...... 쟌이 자기 거니까 건드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교활하고 영리한 에이미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아이였다.

발이 시려워서 수연은 가슴을 덮었던 쟈켓을 내려서 무릎과 발을 덮었다.

에고고....왜 이리 오만군데가 시리냐. 늙어서 그런가....

수연은 여기다 아예 큼직한 밍크 담요를 하나 갖다가 놓아야겠다고 생각한다.

한국마켓에 밍크담요를 아직 팔려나.........

그나저나 걔네들은 잤을까?

문득 아줌마다운 통속적인 호기심이 발동한다.

에이미는 신세대 아이답게, 미국에서 자란 아이답게 남자와 같이 자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편이었다. 십대 때는 '원 나이트 스탠트' 같은 것도 몇 번 해봤다고 수연에게 자랑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첨 본 남자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잠을 자니? 우선 마음이 통하고 나야지. 하다 못해 몇 번 만난 후라면 모를까

수연이 그렇게 말 했을 때 에이미는 콧등을 찡그리며 깔깔깔 웃었다.

"언니. 마음이 통하기 전에 몸이 먼저 통하려고 하는데 난들 어쩌라고!"

그러는 에이미이니 쟌하고 자는 건 일도 아니겠지?

수연은 맹렬한 질투를 느꼈다. 수연은 소리나게 몸을 뒤척여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가슴 속에 커다란 불꽃 하나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다. 질투라는 거센 불길이.

쟌의 단단하고 넓은 가슴에 에이미가 안겼을 생각을 하니 입에 침이 바짝 마를 정도로 괴롭고 힘든 것이다.

지 좋아하는 놈이 쌔고 쌨구만.....하필이면...왜 하필이면......

바로 그때. 수연은 꿈결처럼 귓가를 간지럽히며 들려오는 쟌의 목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예의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를.

수연은 벽 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가슴에 손을 모으며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하도 그 아이 생각에 몰두하니까 이젠 환청까지 들리는구만, 진짜 이 일을 어쩌면 좋아....

그러나 쟌의 목소리는 바로 가까히서,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수연은 눈을 번쩍 떴다.

" ! "

아아, 놀랍게도, 쟌이, 수연이 꿈속에서도 안타깝게 그리워하던 그 남자가 수연을 내려다 보며 서 있는 것이다!

"주운!"

수연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덮고 있던 쟈켓이 밀려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수연....."

"웬,웬일이야 여..여기는 어떻게 알고........"

수연은 거의 웃듯 말듯한 표정을 지으며 장승처럼 큰 키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쟌을 올려다보았다. 수연의 가슴이 사납게 쿵쿵 뛰기 시작했다.

오오, 하나님, 자비로운 하나님. 제게 이런 놀라운 일도 일어나게 해 주시는군요!

완전히 일어나지도, 그렇다고 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있는 수연의 발치로 쟌이 무릎을 굽혀 앉았다.

"수연......."

"준......"

"수연....."

"준......."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엔 할 말이 없는 사람들처럼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서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뜨거운 눈으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인 것이다.

얼마동안 시간이 흐른 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쟌이었다.

"수연....보고 싶었어요......."

그래,준 나도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미칠 뻔 했어......

그러나 수연은 혀 끝까지 굴러나온 이 말을 꿀꺽 삼킨다. 왜냐면 쟌은 결코 수연이 가질 수 없는 남자라는 것을 수연이 알기에.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끝까지 숨겨야 하기에, 절대로 바깥으로 표현하면 안되기에.

"수연, 부탁이 있어요....."

".............."

"오늘 저녁 우리 부서 사람들하고 클럽에 가기로 했어요. 내일이 스물 일곱 번째 맞는 내 생일이거든요"

"그,그러니?"

"수연. 오늘 밤 당신도 함께 가 줘요.내일이 토요일이니 큰 부담은 가지 않을 거예요."

" ! "

수연은 하마터면 그래, 같이 갈께, 같이 가고 말고, 하고 숨도 쉬지않고 바로 말 할 뻔 했다. 그러나 수연은 혀를 깨물며 그 말을 참았다.

준......나, 너 에게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기로 했어.... 너는, 너는.....나 아닌, 에이미랑 잘 되어야 해. 에이미랑 약속했어......

수연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준, 그게 말이지.....그,그건 안,안돼......"

수연의 말에 쟌의 어깨가 눈에 뜨이게 처진다.

"미안해, 준......."

"알았어요........"

쟌은 힘 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문을 향해 두어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수연에게로 향해 걸어왔다.

"수연...... 내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점심시간에 바깥으로 나오지 않는 것 다 알아요...."

"..........."

"그러지 마요, 수연. 날 피하지 말아요....."

"..........."

길게 내어쉬는 한숨소리를 마지막으로 쟌은 문을 닫고 나갔다.수연은 그 자리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참을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방금 왔다가 나간 남자가 과연 쟌이었던지 꿈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 수연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쟌에게서 늘 풍겨오던 청량한 세수비누 잔향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걸로 봐서 꿈이나 환상은 아닌 것 같았다.

수연은 옅은 진땀까지 배어나오는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내일이 생일이라고 했나. 내일, 그러니까 토요일인 내일이 그의 스물 입곱 번째 생일이라고.........

그날 밤 수연은 새벽이 오도록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1분에도 열 두번씩 변하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때문이다. 첨엔 자신이 대견하다싶은 마음이 더 컸었다.

잘했어. 그렇게 딱 선을 긋는거야. 마음가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따라가다가는 절대로 그 남자에게서 헤어나지 못하기 쉽상이지......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쟌의 요청을 거절한 자신이 한심하고 미워서 발등을 찧고 싶은 것이다.

'내가 얼마나 미울까. 어렵사리 꺼낸 부탁이었을 텐데 단번에 거절했으니.......일찍 자리를 뜨는 한이 있더라도 잠깐 참석이라도 한다고 할 걸......'

무엇보다 수연은 잠시동안이라도 가까히서 그를 보고 싶다. 쟌이 다른 부서로 옮겨간 후 수연이 그의 얼굴을 마주한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그것도 복도나 휴게실에서 마주쳐 잠깐 눈인사를 나눈 게 전부인 것이다.

아, 그의 얼굴을 오랫동안 가까히서 볼 수 있는 절호의 챤스였는데 그걸 거절하다니...바보같이, 정말 바보같이.......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아무래도 그 자리엔 수연이 낄 자리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같은 부서사람도 아닌 수연이 쟌의 생일파티에 나타나게 되면 여러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다음 날로 단박에 에이미의 귀에 들어갈 지도 모른다. 에이미의 성격으로 봐서 그 말을 들으면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가까워진 요즘의 두 사람의 관계로 봐서 어쩌면 에이미가 쟌의 생일파티에 참석할 지도 모른다. 스스럼없는 성격의 에이미는 사람들에게 말하겠지.

나, 쟌의 여자친구예요. 오늘 여기는 쟌의 여자친구 자격으로 왔어요....

쟌과 에이미는 둘이 껴안고 멋지게 춤을 출 지도 모른다. 현란한 조명과 시끄러운 음악,그리고 소란스런 분위기를 틈타서 어쩌면 둘이 깊은 키스를 할 지도 몰라...

수연은 귀를 막았다.

쿵쾅쿵쾅하는 클럽의 음악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리는 듯해서.

 

 

다음 날은 토요일이었다.

밤새 한잠도 못자고 뒤척이던 수연은 날이 밝자마자 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 일이란 쟌의 아파트로 찾아가는 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했던가. 천만군대를 호령해도 자신의 마음하나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그 장수는 실패한 장수다.

이 세상에 자기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특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경우.

수연은 조수석에 가득 실린 식료품 백을 내려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나는 그냥 마음이 시키는대로 행동할 뿐이야. 흐르는 강물처럼 흐르면 흐르는대로....마음이 시키는 일이 뭐냐고? 객지에 떨어져 혼자 있는 그 아이에게 생일상을,한국식으로 차린 생일상으로 아침을 먹여주는 일이지......

수연은 지금 무작정 길을 나선 것이다. 언젠가 쟌이 회사 바로 근처의 아파트에 산다고 지나가는 말처럼 한 걸 기억하고 있지만 방 홋수는 모르고 있었다.그러나 수연은 걱정하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수연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운이 좋으면 금방 방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쟌이 타고 다니는 트럭이 주차된 곳으로 가서 기웃거려보면 되겠지.

그러나 그날 수연의 운은 지나치게 좋았다. 아파트 진입로를 막 들어서자마자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는 쟌과 딱 마주치고 만 것이다.

오,하나님!

웃통을 벗어부친, 가슴과 배의 왕 자가 선명한 구릿빛 피부의 남자가 쟌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 남자가 무심한 얼굴을 하고 앞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는 순간 수연은 헉,신음소리를 내며 자신도 모르게 페달에서 발을 떼었다. 그리고 수연은 순간 자신의 심장이 이대로 멎어버리는 건 아닐까,하고 생각했다.

차가 저 혼자 앞으로 슬슬 미끄러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연은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멈출 생각도 못했다. 그녀는 그저 입을 벌린 채 멀거니 쟌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놀라기는 쟌도 마찬가지였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그리워하던 여자 수연이 지금 거짓말처럼 자신 앞에 턱 나타났으니까.

계속-

9월 1일에는 '불륜의 냄새 '가 이어집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