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의 냄새

"밍크 담요가 있나,하고 한국 가게에 갔었는데......."

"............"

"사무실 안이 너무 추워서 말이지........"

"..........."

쟌의 아파트를 찾아 차를 몰아오던 대담함은 다 어디로 갔을까. 지금 수연은 쟌 앞에서 쩔쩔매고 있다.

밍크담요를 사러 한국가게에 갔다가 햇 미역을 보는 순간 쟌, 네 생각이 나더라고, 객지에서 가족친구도 없이 쓸쓸하게 생일을 맞을 너를 생각했다고 수연은 차근차근 설명하지 못했다.

미국 온 후 어쩌면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을 한국식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에 앞 뒤 생각없이 장을 보고 바람같이 달려왔다고 자기의 생뚱맞은 행보를 설명을 하고 싶긴 한데 도대체 말이 조리있게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바보처럼 횡설수설 하고 있는 것이다.

수연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리 쟌의 생일상을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해도 이렇게 이른 아침에, 아홉 시도 되지않은 이른 아침에 생전 한 번 와보지도 않은 남자의 집을 찾아 온 건 누가 봐도 미친짓이니까.

"일단 들어 가요"

쟌은 비어있는 주차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수연은 그제서야 자신의 차가 길 한복판에 버티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동은 꺼져있었다. 차가 저절로 미끄려져 앞으로 나간 것까지는 알겠는데 시동을 자신이 껐는지는 도통 기억이 없다. 수연은 쿵당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면서 차를 쟌이 가리키는 곳으로 천천히 갖다대었다.

"준, 이, 이것 좀......"

수연은 허둥대면서 조수석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쇼핑백을 손가락질했다. 쟌은 의아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말 없이 수연의 반대편으로 가서 차 문을 열고 쇼핑백을 꺼내 두팔 가득 안았다. 그리고 수연에게 말했다.

"저기 문 열려 있는 집 보이죠?저 집이예요"

수연은 앞장 서 걷고 있는 쟌의 뒤를 고개를 푹 숙이고 따라갔다.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수연의 가슴은 불안에 가득차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걸 후회하는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상만 차려주고 금방 갈 텐데 뭐.........

그러나.

수연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쟌의 품에 그대로 갇혀버리고 말았다. 쟌은 쇼핑백을 부엌 카운터에 내려 놓자마자 그대로 수연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연을 있는 힘을 다해 껴안았던 것이다. 뒤돌아 서서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있던 수연은 피할 사이도 없이 그대로 쟌의 두 팔에 꼼짝없이 결박되었다.

수연의 키가 작았으므로 그녀의 얼굴은 쟌의 벗은 맨가슴께에 파묻히는 형상이 되었다.

"수연!"

"..........."

"수연! 보고 싶었어요.아아,수연! 이렇게 거짓말같이 내 앞에 나타나다니!"

둥둥둥.

수연은 쟌의 천둥치는 심장박동 소리를 바로 코 앞에서 들었다. 쟌의 품에 안긴 수연의 정신도 아득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하나님!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러나 수연은 쟌의 몸을 밀어내지 않았다. 오히려 비 맞은 병아리가 어미품을 파고들 듯 쟌의 품으로 파고 들어갔다.

아아, 만약 이 순간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아라.

수연은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이 순간 그냥 숨이 끊어진다해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면서.

"사랑해요, 수연......."

"..........."

"수연!"

"그래,나,나도 주..준을 사랑해........."

"수우연!"

그들은 서로를 껴안은 채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엄청난 힘의 양극과 음극의 자석처럼. 그 둘 사이는 종이 한 장 들어 갈 틈 없이 강하게 밀착돼 있었다.

애타게 서로 그리워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둘 다 애타게 기다려왔던 순간이기도했다. 비록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비록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의 숨결과 체취를 가까히서 느껴보기를 죽을 만큼 매일 갈망했던 사람들이었다. 쉽사리 포옹을 풀 사람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서로의 입에서 사랑을 확인한 마당아닌가.

먼저 몸을 뗀 건 수연이었다. 쟌의 맨 가슴에 얼굴이 눌려 숨을 거의 쉴 수 없었기 때문이다.수연은 호흡을 하기위해 쟌의 품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어젯 밤 잘 놀았니?"

수연은 부엌카운터에 놓여진 쇼핑백에서 식료품들을 주섬주섬 꺼내면서 물었다. 지금 수연에겐 시간이 없었다. 얼른 집에 돌아가야 했다. 오늘 새벽까지 서재에 불을 밝히고 있던 에릭이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걸 보고 나온 길이었다. 평소 늦잠을 자지 않는 에릭이라 어쩌면 벌써 일어나 있을지도 모른다. 일어나서 커피를 찾을지도 모른다. 수연은 마음이 급했다.

"가지 않았어요......"

"가지 않다니?"

수연은 콩나물이 담긴 비닐봉지를 꺼내던 손을 멈추었다.

"당신이 가지 않은 자리에 나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몸이 불편하다고 그러고 파티를 취소했어요......"

"............"

수연은 할 말을 잊고 만다.

내가 너한테 그렇게 크고 무거운 존재였니. 몇 십명이 계획해 준 생일파티를 단지 내가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취소할 만큼.

쟌은 부엌으로 와서 수연의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둘러 뒤로 안았다. 그리고 옆으로 고개를 숙여 수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수연...당신이 나를 찾아 오다니...정말 꿈만 같아요......"

"준....나, 시간이 없어......."

수연은 자신의 가슴을 족쇄처럼 단단히 포박하고 있는 있는 쟌의 팔을 떼어냈다.

"나 얼른 돌아가야 해........."

"............"

생일상이 차려진 건 그로부터 40여분 후였다. 작은 아파트 방안은 고소한 참기름 냄새로 가득 채워졌고 식탁엔 미역국, 콩나물 무침, 시금치 나물, 그리고 계란찜이 올려졌다.

"준이 냄새와 맛이 강한 한국음식을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서 다 심심한 나물종류로 했거든........"

"한국식당에 가서 내가 늘 즐겨먹던 음식들이예요.. 고,고마와요 수연."

"김치가 다 떨어진 줄 알았으면 올 때 한 병 가져오는 건데.....다음에 주지 뭐"

다음에 갖다 줄께,하고 말하려다 수연은 참았다. 이번은 어쩔수 없었다치더라도 다음부터는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것이다. 다음에는 생일상을 차려준다는 명분도 없을 것 아닌가.

"예....."

쟌이 유치원생처럼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조금 있으면, 한 오 분 정도만 있으면 밥에 뜸이 들테니까 밥이랑 같이 먹어. 미역국은 좋아할지 어쩔지 몰라서 딱 한 그릇만 끓였으니까......."

수연은 앞치마 대신 앞을 두르고 있던 타올을 주섬주섬 벗었다.

"나 가야 해. 늦었어........"

"조금만 조금만 더 있어주면 안돼요? 10분만,아니 5분만......"

쟌이 간절한 얼굴로 수연을 쳐다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는 수연의 마음도 애절했다. 그러나 수연은 말없이 핸드백을 집어들었다. 마음같아선 하루종일 같이 있고 싶지만 그녀는 가야 하는 것이다.

"미안해, 준...."

"수연....."

"잘 있어. 그리고 생일 축하해......."

"수연........"

수연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서둘러 아파트를 나왔다. 나오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흘낏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큰일났네...한 삼십분이면 될 줄 알았는데.........

수연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매려고 하는데 언제 따라나왔는지 차 옆에 쟌이 서 있는 게 수연의 눈에 들어왔다. 수연은 차창을 내렸다.

"잘 가요, 수연........."

"응........"

"많이 보고 싶을 거예요......"

".............."

수연은 차를 출발시켰다. 반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이쪽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 있는 쟌의 모습이 백미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모습을 수연은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쟌, 어서 들어가. 어서 들어가서 밥 먹어.......

쟌의 아파트에서 집까지는 정상적인 속도로 15분 걸리는 거리였다. 그러나 수연은 10분이 채 되지 않아서 집에 도착했다. 빨간 신호등도 무시하고 정신없이 달린 덕분이다.

차고 문을 열었을 때 어제 저녁 주차한대로 얌전히 서 있는 에릭의 차가 수연의 눈에 먼저들어왔다. 에릭은 토요일 아침이면 으레 나가는 골프도 안 간 모양이었다.

수연이 신발을 벗는 둥 마는 둥 하고 집안으로 들어갔을 때 수연의 코 끝에 와 닿는 건 향긋한 커피냄새였다.

"에릭........"

에릭은 혼자 식탁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다가 들어오는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미,미안해요.에릭......"

"아침부터 어딜 갔다 온 거야?"

에릭의 말투는 부드러웠다.

"한,한국 마켓에......."

에릭은 몸을 일으켜서 내려진 커피를 잔에 따랐다. 그리고 수연에게 내밀었다.

"커피 안 마셨지?"

"예에........"

"한국마켓에 이렇게 일찍 갈 일이 있었나보군. 그런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린 것 같은데?......."

"예에....저, 그....그게......."

수연은 둘러대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수연과 처음 만난 7년 전 날짜까지도, 그리고 당시 수연의 옷차림까지도 지금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남자가 에릭이었다. 섣불리 둘러대거나 거짓말을 시킬수 없는 남자가 에릭이었다.

"사실은 한국마켓에 갔다가 쟌네 아파트에 들렀었어요......"

수연의 말에 에릭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쟌이라면 그 입양아 말인가?"

"예에, 오늘이 그 아이 생일이래요... 이번 생일에는 꼭 한국식 밥을 먹고싶다고 해서........"

스스로 찾아가서 생일상을 차려주고 왔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는 수연이었다. 그랬다면 그건 누가 봐도 미친년의 행위로밖에 보여지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생일상을 차려주고 왔다고?"

"예에....."

수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기분 나쁘다면 죄송해요......."

그러나 에릭은 별로 대수롭지 않는 투로 대꾸했다.

"거참 좋은 일을 했군"

".........."

그는 휘파람을 불며 식탁에서 일어났다.

"오늘 아침은 오랫만에 오믈렛으로 먹을까?내가 할까,아님 당신이?"

"제,제가 할께요"

수연은 황급히 몸을 움직여 반쯤 비어 있는 에릭의 잔에 커피를 더 따랐다.

"커피 마시면서 여기 그냥 앉아계세요. 십 분, 십 분이면 되니까........."

그때, 수연이 커피를 따르기 위해 에릭 쪽으로 몸을 기울였을 때, 에릭은 맡았다. 수연의 몸에서 나는 낯선 비누 냄새를.

그것은 외간 남자의 냄새였다. 야릇한 불륜의 냄새였다.

 

 

"예에, 고마워요, 엄마. 그럼요, 직장동료들이 파티를 해 주었죠"

쟌은 양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있는 중이다. 쟌은 하지도 않은 파티를 했다고 양어머니를 안심시킨다. 온통 마음을 뺏기고 있는 여자가 아침일찍 와서 한국식으로 생일상을 차려주었다는 말은 쏙 뺀다. 물론 그 말을 할 수 없어서다. 그 말을 하면 미국사람답지않게 참견하기 좋아하고 수다스러운 양어머니는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다. 나이는 몇이냐, 어떻게 만났느냐......그러나 쟌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수연은 이미 결혼 여자이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또 전화할께요"

쟌은 전화를 끊고 벽을 쓰다듬어 불을 켰다. 어느 덧 어스름한 저녁이다. 운동을 하러 나갈까, 하다가 쟌은 그냥 소파에 주저앉는다. 8월 중순으로 접어드는 날씨는 뜨겁기가 용광로같았다. 땅거미가 이미 진지 오래지만 바깥기온은 한증막이 따로 없을 정도로 달아올라 있을 터였다.

그때 쟌은 누가 자신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문을 열었다.

문 밖에는 에이미가 서 있었다. 케잌과 풍선, 샴페인등을 양손 가득 들고서.

"생일 축하해요 쟌!"

그녀는 문 손잡이를 잡고 멍청하게 서 있는 쟌의 몸을 가볍게 밀치면서 집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하루종일 뭐했어요? 당신 생일인데......."

"에이미. 이러지 않아도 돼....."

문을 닫고 들어오는 쟌의 얼굴에 살짝 짜증이 묻어났다.

"난 이렇게 요란한 것 싫어......."

"쟌....."

에이미가 가져온 것들을 식탁에 놓고 돌아서며 쟌에게 안겼다.

그녀는 빨간 장미꽃 무늬가 현란한 검은색 저지 천의 미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딱 달라붙어 에이미의 육감적인 몸매가 그대로 들어나는 드레스였다. 에이미는 밑으로 늘어뜨려져 있는 쟌의 두 손을 들어다가 자신의 잘룩한 허리를 감게했다.

"바보처럼 굴지말고 꼭 좀 안아봐요"

"에이미. 이렇게 연락도 없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 나 참 싫어"

"..........."

에이미는 올리지도,내리지도 못하고 자신의 허리근처에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쟌의 두 팔을 몸에서 떼어냈다. 한 겨울의 매서운 칼바람이 에이미의 가슴 한 편을 할퀴고 지나갔다.

저 남자는 왜 나한테 친절하지 못하는 걸까.

그러나 에이미는 서운함을 속으로만 감춘다.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여전히 명랑한 목소리로 쟌을 쳐다보고 말한다.

"이 케익 특별히 쟌을 위해 달지 않게맞춘 거예요. 이리 와 앉아요 촛불을 꺼야하니까....."

"에이미...."

쟌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면서 식탁에 가서 앉는다.

그런데.

글래스와 접시를 꺼내기 위해 부엌에 들어갔던 에이미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스토브에 무언가를 요리한 흔적이 있는 것이다. 그동안 서너번 이 아파트를 드나들었지만 쟌이 요리하는 것을, 아니, 스토브 자체를 쓰는 것을 단 한 번도 보지못했던 에이미였다. 에미는 고개를 갸웃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 ! "

냉장고 안에는 먹다남은 시금치 나물과 콩나물이 든 반찬그릇이 두껑도 덮히지 않은 채 얌전히 놓여져 있었다. 랩이라는 게 있을리 없는 쟌이 먹고남은 반찬을 그냥 냉장고에 넣어둔 것이다.

에이미는 즉각적으로 수연이 왔다간 걸 알았다.

"쟌......"

에이미는 힘 없이 냉장고 문을 도로 닫았다.

"수연이 왔었군요........"

계속-

9월 15일에는 '깊은 수렁 속으로 '가 이어집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