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발트 블루색의 셔츠

에릭은 빈 커피 잔을 책상에 내려놓으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아까부터 눈이 뻑뻑하고 뒷골이 당겨오는 것이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지 않다. 잠깐이라도 눈을 부쳐야 밀린 오후 스케줄을 다 소화해 낼 것 같다.

 

에릭은 지금 법원에 다녀 오는 길이다.

지난 4월에 맡았던 억만장자의 이혼을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하고 끌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일이 매끄럽게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두 사람이 이혼에 이르게 된 데에는 누가 봐도 여자 쪽 잘못이 월등히 더 크다. 그런데 가당치도 않게도 여자 쪽 요구가 갈수록 터무니 없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자 쪽은 아예 쌍동이 아이들을 빌미로 남자의 껍데기를 벗기기로 작정을 하고 덤비는 것 같았다. 말도 되지도 않는 이유를 들어 재산 분할을 요구하고 나오는 것이다. 남자 쪽 재산의 거의 전부를.

토네이토하고 캘리포니아 주에서 이혼하는 여자의 공통점이 '싹 다 쓸어가는 것' 이라고 하더니......

에릭은 고개를 뒤로 눕히고 눈을 감았다.

그때 인터폰 벨소리가 들렸다.

또 뭐야.

에릭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면서 몸을 뒤로 눕힌 채로 손을 뻗어 인터폰을 받았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급하지 않은 손님이면 좀 기다리고 하지"

"에이미라고......"

에이미?

에릭은 앞으로 몸을 일으켰다. 에이미가 날 찾아 왔다고? 에릭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뭔가 집히는 게 있어서이다. 에릭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무뚝뚝하게 내뱉았다.

"들어 오라고 해"

그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곤함과 성가심이 배어나 있었다.

에이미가 들어 선 건 1분도 되지 않아서였다. 에릭은 일어서며 에이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여어,에이미 오랫만이야. 지금 근무시간일 텐데? 오늘 출근하지 않았나?"

에이미는 에릭의 크고 투실한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조퇴하고 왔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에이미는 에릭이 권하는대로 사무실 한 켠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에릭은 에이미에게서 어딘지 모르게 착 가라앉은 듯한 무거운 분위기를 느낀다. 늘 당당하고 쾌활하던 에이미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우울한 분위기이다. 에릭은 그런 에이미에게서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는 것을 읽어낸다.

"여기 오기까지 많이 망설였어요. 근 일 주일 동안을......"

"............"

에릭은 팔짱을 끼고 앞에 앉아 있는 에이미의 얼굴을 묵묵히 쳐다보았다. 지금 에이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에릭은 알고 있는 것이다.

수연과 그 쟌이라는 입양아....

지난 몇 달동안 에릭의 마음이 어지럽고 무거웠던 것도 바로 그 두 사람때문이었다.

"변호사님은 지금 부인께서 다른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 것 알고 계시나요?"

"............"

에릭은 에이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에릭의 눈빛은 차고 냉랭했다. 에릭이 말했다.

"다른 남자라면, 그 입양아 말인가?"

"벌써 서너달 전부터 둘 낌새가 이상한 걸 알긴했었어요.그렇지만 그렇게 대놓고 아파트에까지 드나들 줄은 몰랐어요"

에릭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에이미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나쁜 여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아니, 지난 달이었을 거예요. 수연이 그 남자 아파트에 간 걸 내가 처음 알아챈 게....그러나 그땐 확실치가 앉았어요. 그냥 짐작만 했지요. 그런데 이번엔 그 남자 아파트에서 나오는 걸 제가 목격했어요. 바로 일 주일 전에."

"................"

"아파트를 나오는 수연의 행동으로 봐서 그 남자의 아파트를 들락거린지는 꽤 오래된 것 같았어요. 아주 태연하고 자연스런 태도였거든요 ....."

"내 사무실에 와서 이런 얘길 하는 걸 수는 알고 있나?"

"네?"

"수는 에이미를 직장동료 이상의 절친한 친구로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야........"

에이미의 고개가 앞으로 서서히 숙여졌다.

"별로 신날 것도 없는 친구의 얘기를 이런 식으로 고해바치고 다니는 건 나쁜 버릇이야"

에릭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힐난조였다.

"수가 그 입양아의 아파트에 가는 것,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야. 그 친구가 한국음식을 좋아한다는구먼. 수는 그 친구 음식 만들어 주러 가끔 가는 거야"

"두 사람 관계는 그 이상이라구요!"

에이미가 고개를 번쩍들고 에릭을 향해 앙칼지게 소리쳤다.

"둘은 사랑하고 있는 사이란 말이예요. 둘은, 어쩌면 둘은 같이 잠을 잤을 지도 모른다구요!"

"에이미가....."

에릭이 왼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에이미가 두 사람 자는 걸 직접 목격했나?"

".............."

"확실한 증거없이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되지.........."

단단하고 육중한 벽 하나가 턱,하고 에이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난 번 쟌 생일날 쟌 앞에서 느꼈던 단단하고 무거운 벽.

"그 친구를 좋아하나 본데 젊은이답게 당당하게 부딪쳐 봐.그 놈을 찾아가서 담판을 지으란 말이야. 이런 식은 안돼. 이건 비겁한 쥐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라구...."

쥐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라구.

에릭의 마지막 말이 에이미의 가슴을 아프게 헤집고 들어왔다.

그말은 너무 심했다. 에이미는 항변할 힘을 잃고 묵묵히 에릭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에릭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집으로 찾아갈 때마다 매번 색다른 요리를 해주고 유쾌한 농담으로 에이미를 웃겨주던 그 다정함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만 가보지. 에이미....."

에이미는 천천히 일어났다. 에릭도 천천히 일어났다. 사무실 왼 쪽으로 난 큰 창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두 사람은 보았다.

비가 오는 군.

에릭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 에이미는 에릭의 사무실을 나오면서 생각했다.

 

 

오후에 들어서 서서히 뿌리기 시작하던 빗방울이 저녁 무렵부터는 거센 빗줄기로 변했다. 초가을 들어서 처음으로 오는 비였다. 거친 빗줄기는 여름내내 달구어진 대지를 적시고 작은 도랑을 곳곳에 이루었다. 가끔 콰르릉 하고 천둥이 울기도 했다.

수연은 여느 때와 같이 쟌의 품에 안겨있다가 천둥 소리에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이거 천둥소리 맞지?"

쟌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연의 몸을 다시 끌어안았다. 비가 오고 있어서일까. 저녁 나절이면 떠들어 대던 아이들 소리도 없고 주위는 조용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다. 천지사방을 때리는 빗소리 뿐.

수연은 오늘따라 쟌의 포옹이 유난히도 뜨겁고 격렬하다고 느낀다.

"나 가야 하는데...."

수연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말했다. 퇴근하고 바로 이리로 와서 벌써 30분이 지났다.

"가지 말아요,제발 가지 말아요 수연......"

쟌이 속삭이며 수연의 목덜미에 입술을 갖다댔다.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쟌의 입술에 수연의 소스라치고 만다.

"준,아아,준...이..이러지 마....."

"수연....."

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수연의 흰 목덜미를 사정없이 핥기 시작했다. 숨이 멎을 것 같이 자지러지는 쾌감에 수연은 진저리를 친다. 입은 하지 말라는 말을 연신하지만 수연의 몸은 파도를 타는 것 같은 황홀한 기분에 휩쌓여 있다. 금방 그녀는 그런 본능에 자신을 내맡겨버린다. 쟌의 입술이 자신의 목을 물고기처럼 마음대로 유영하게끔 내버려 두는 것이다.

"수연, 사랑해요...."

"..주..준...나..나도......"

수연의 목 언저리를 핥아대던 쟌의 입술은 수연의 귀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의 입술이 수연의 귓바퀴를 물더니 마구 빨아대기 시작했다. 수연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수연의 목이 활처럼 뒤로 빳빳하게 휘어졌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호흡을 멈출 듯이 몸부림쳤다.

쟌의 입술이 마침내 수연의 입술에 닿았을 때, 그리고 그의 혀가 수연의 입술을 헤집고 속으로 마악 헤엄쳐 들어가려고 했을 때 콰르르릉,하고 다시 천둥이 울었다.

번쩍 정신이 든 수연. 그녀는 숨을 몰아쉬면서 쟌의 몸을 거칠게 밀쳐냈다.

"안 되겠어......"

수연은 빠른 몸짓으로 일어나서 식탁의자에 걸쳐두었던 반코트를 집어들었다.

"미안해, 준. 나 갈께...."

수연은 벗어두었던 구두를 발에 꿰는 둥 마는 둥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쏴아, 하는 빗소리와 함께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방안으로 들이 닥쳤다. 바깥은 벌써 어두워져 있었다.

수연은 문을 채 닫지도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핸드백으로 머리를 가리며 그냥 빗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달아오르던 수연의 몸에 차가운 빗줄기가 사정없이 내리쳤다. 수연은 남의 눈에 뜨일까 쟌의 아파트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한 자신의 차를 향해 마구 뛰었다.

난 미친 년이야. 미친 년. 난 천벌을 받고 말 거야......

혼자 남은 쟌은 수연이 채 닫지도 못하고 간 출입문을 다시 닫을 생각도 못하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열려진 문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계속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탐닉했던 수연의 부드럽고 흰 목덜미와 거의 닿을 듯 말 듯 했던 수연의 입술과 혀가 먼 꿈나라의 일 같이 아스라하게 느껴져서 쟌은 연신 두 손바닥으로 마른 세수를 했다.

아무래도 자기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어쩌면 수연이 여기에 다시 안 올지도 몰라...

쟌은 두 팔을 무릎에 괴고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쑤셔넣었다.

조금만 참을 걸..조금만 참았으면 될 걸.

그러나 수연이 아파트에 오기 시작한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수연은 멀리 있는 환상이 아니라 눈감으면 없어지는 신기루가 아니라 손 내밀면 금방 와 닿는 실체였다. 실체를 바로 눈 앞에 두고 쟌은 한 달을 넘게 인내해 온 것이다.

아,어떻게 하지.......

쟌은 자신의 품에서 몸부림치던 수연의 몸을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쟌의 뜨거워진 몸은 그때까지 식지않고 있었다. 어두운 빗 속을 뚫으며 한바탕 나가 뛰고 들어오던지 찬물로 샤워라도 해야 진정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건 마음 뿐 쟌은 넋나간 사람모냥 소파에 앉아 바람 때문에 반쯤 열려져 있는 문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랬는데 반쯤 열려 있던 문이 활짝 젖혀졌다. 그리고 뜻밖에도,거짓말같게도 에이미가 들어 서는 것이다.

베이지색 짧은 면 원피스와 밤색의 쟈켓을 걸치고 있는 에이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양동이 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흠뻑 젖어 있었다. 그녀의 쟈켓 자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에이미!?"

쟌은 놀라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미는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담임선생님의 꾸중을 기다리는 학생처럼 엉거주춤 문간에서 쟌을 바라보고 서 있있다.

"문을 이렇게 열어놓고 뭐하고 있었어요?"

"들어 와. 얼른 들어 와. 에이미가 이 시간에 여길...이것 참 놀랍군."

그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함께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그건 놀라운 변화다. 쟌이 에이미의 출현을 반가와하다니. 그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에이미는 쟌이 이끄는 대로 집안으로 들어섰다.

"추워요. 벽난로를 좀 켜 줘요"

쟌의 예기치 않은 환대에 용기를 얻은 에이미가 쟌에게 요구했다.

"그러지"

쟌은 가스로 켜게 되어 있는 벽난로의 스위치를 올렸다. 그리고 에이미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몸에서 쟈켓을 벗겨 냈다.

"이런, 흠뻑 젖었군."

"이 앞에는 주차할 곳이 없었어요. 그래서 멀리 주차하고 걸어오느라....."

"지금 퇴근하고서 오는 길이야?"

쟌의 물음에 에이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릭의 사무실에 찾아갔었다고, 에릭으로부터 잔뜩 질책과 비난만 당하고 돌아왔다고, 그래서 죽고싶은 마음에 혼자 바에 가서 술을 한 잔하고 오는 길이라고 에이미는 말하지 않았다. 슬프고 분하고 쓸쓸하고. 그렇게 기분 더러울 때 역시 생각나는 건 쟌, 당신뿐이더라고,그래서 당신이 반가와 하지 않을 줄 알면서도, 냉대를 받을 줄 알면서도 무작정 여기로 차를 몰아왔다고 에이미는 말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예상외로 쟌이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술 있어요?"

에이미는 머리를 흔들어 젖은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어 내면서 물었다.

"있어"

쟌이 예전에, 수연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하고 자책에 못 이겨 사다 마시다 둔 술병을 기억해내고 고개를 끄덕했다.

쟌이 술병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는 걸 보면서 에이미는 쟌의 침실로 걸어 들어 갔다. 벽의 스윗치를 올리고 클로젯 문을 열었다. 클로젯 안에는 잘 다림질 된 서너벌의 와이셔츠가 걸려 있었다. 에이미의 눈에 띈 건 검은색 계통의 다른 셔츠와 걸려 있는 코발트 블루색의 셔츠였다. 언젠가 그 셔츠를 입었던 쟌의 모습을 에이미는 기억해냈다. 그때 에이미는 생각했었다. 코발트 블루색을 저렇게 잘 소화하는 남자는 이 세상에서 오직 저 남자뿐 일거라고.

에이미는 잠깐 망설이다가 옷걸이에서 그 셔츠를 벗겨냈다. 그리고 비에 젖어 축축한 원피스를 벗고 그 셔츠, 그 코발트 블루색의 셔츠를 입었다. 길이는 허벅지를 덮었지만 소매가 길어서 에이미는 소매를 둥둥 걷어올렸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얼음과 노르스르한 액체가 든 유리 글래스를 들고 걸어오던 쟌이 에이미를 보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원피스가 다 젖어서.."

"에이미, 그 셔츠는......"

"원피스를 말릴 동안만 이 셔츠를 빌릴께요."

에이미는 쟌의 손에서 빼앗듯 술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어리광 부리듯이 쟌에게 말했다.

"이 원피스 드라이기에 좀 돌려 줄래요?"

쟌은 가는 한숨을 쉬면서 에이미의 손에서 젖은 원피스를 받아들었다.

그는 수연과의 첫 데이트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벚꽂이 바람에 눈처럼 휘날리던 날,수연의 빨간 스포츠 카를 타고 가서 단 둘이서 쇼핑을 하던 날. 점원이 '요즘 젊은 동양인 표준 체격이라서 사이즈가 동이났다'고 미안해 하던 날.

그때 점원으로부터 들은 동양인 표준체격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쟌의 가슴에 찬란한 기쁨으로 남아있었다.

철 들기 시작하면서 자각하기 시작한 형제들과 다른 자신의 생김새에 쟌은 정체성의 혼란을 느꼈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나는 백인에 속할까, 동양인에 속할까.

어쩌다 온 식구가 외식이라도 하게 되면 일곱 명의 금발머리에 섞인 자신의 검은색 머리가 얼마나 사람들에게 생경하고 이상하게 비칠까 하는 생각이 쟌의 머리에 늘 떠나지 않았었다.

나이가 들면서 강도는 약해졌지만 자신은 이쪽저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느낌을 그는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그날 옷가게 점원이 확인시켜준 것이다. 쟌 너는 동양인이야, 그것도 표준 체격을 갖춘 동양인.

그날 수연이 사 준 코발트 블루 셔츠를 지금 에이미가 입고 있다. 그러나 쟌은 에이미에게 셔츠를 벗으란 말을 하지 않았다. 오늘은 에이미가 전혀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성가시다니. 지금 쟌은 에이미가 고맙기까지 하다. 비가 와서일까. 오늘따라 유난히 혼자라는 외로움이 뼛 속까지 스며들 때 에이미가 와 준 것이다.

이 비 오는 가을 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에이미가 옆에 있는 것이다.

부엌에 딸린 드라이기에 원피스를 집어넣고 그가 다시 응접실로 나왔을 때.

쟌은 불꽃이 피어오르면서 막 열기를 내기 시작하고 있는 벽난로 앞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에이미를 보았다. 쟌은 얼굴을 찡그리며 그 자리서 잠깐 우뚝 섰다. 코발트 블루색 셔츠 밑으로 쭉 뻗어져 나와 있는 에이미의 두 다리가 너무 희고 눈부셔서였다. 그녀의 다리는 너무나 육감적이고 관능적이었다.

"이쪽으로 와요, 쟌"

쟌은 에이미의 말대로 하는 대신 잠자코 벽으로 걸어가 스윗치를 내려 불을 껐다. 밝은 불빛밑에 훤히 드러나 있는 에이미의 다리를 마주 쳐다 볼 자신이 쟌에게는 없다. 그리고 쟌은 소파로 가서 앉았다. 그러는 쟌을 향해 에이미는 다시 손짓하며 말했다.

"이쪽으로 오라니까요"

쟌은 잠깐 망설이다가 주춤거리며 에이미의 옆으로 가 앉았다. 에이미의 옆에 앉았을 때 그를 맞은 건 갑작스럽게 부딪쳐 온 에이미의 입술이었다. 쟌은 안지도 눕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에서 에이미의 입술을 받았다. 에이미의 입술은 선뜻하게 차가왔지만 그 입술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은 뜨거웠다. 에이미는 자신의 입술을 쟌의 입술에 갖다대고 마구 부벼댔다. 그녀는 쟌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쟌....."

에이미의 팔이 쟌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나를 가져요......"

아까 수연과 함께 잠깐 뜨거워졌다가 식었던 욕정이 꿈틀,하고 쟌의 몸 한가운데서 되살아났다. 쟌은 다리를 포갠 채 인어처럼 비스듬히 누워 있는 에이미의 상체를 와락 껴안았다. 그 바람에 에이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나동그라졌다. 쟌의 입술이 에이미의 입술을 파고들어 갔다. 그리고 미친 듯이 빨아대기 시작했다. 에이미의 입속에서 둘의 혀가 얽혔다.에이미의 혀와 입술은 강한 흡착력을 가지고 있었다. 쟌의 몸은 금방이라도 에이미에게 빨려들어 갈 것 같이 풀어지고 있었다.

둘의 숨막히는 키스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쟌의 입술은 에이미의 목덜미를 지나 봉긋 올라온 에이미의 가슴 위에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그의 손과 입술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가슴 위에서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에이미는 자신의 손으로 셔츠의 앞 단추를, 코발트 블루색의 셔츠 앞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마침내 까만 레이스 브래지어에 쌓여진 에이미의 풍만한 가슴이 쟌 앞에 드러났다.

에이미가 쟌을 향해 속삭였다.

"주저하지 말아요...오늘 밤, 나는 당신 거예요....."

쟌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에이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잠시후. 그는 결심 한 듯 에이미의 등 뒤로 손을 집어넣었다. 브래지어 후크를 풀기 위해서였다.

-계속-

10월 15일에는 '친구라는 이름의 여자' 가 이어집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