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라는 이름의 여자
재키는 삶은 국수를 대접에 담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을 보았다. 오후 서너시 쯤부터 흩뿌리기 시작하던 비가 거센 빗줄기로 변해 지금까지 계속 내리고 있다.
재키는 오늘 퇴근이 늦었었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한 여자의 이혼 상담 때문이다. 변호사가 퇴근을 못하고 있는데 사무직원이 먼저 퇴근할 수가 없어서 덩달아 같이 늦고 만 것이다. 이혼상담은 늘 그렇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고 두 시간이 세 시간이 되고 만다.
"국수 다 되었어"
재키는 작은 방 쪽을 향해 소리쳤다. 언제나 그렇듯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대꾸도 없다.
어휴, 저 지겨운 인간.
재키는 거실바닥에 온갖 장남감을 늘어놓고 놀고 있는 네 살난 아이에게 말했다.
"들어가서 아빠 빨리 나오라고 해. 국수 다 불겠다"
그러나 재키는 안다. 남편 창연이 금방 식탁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은 국수대접을 식탁에 놓는 대신 쟁반에 담으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이젠 지긋 지긋해.....
씨름하지 말고 아예 창연에게 갖다 주려는 거다.
예상대로 창연은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었다. 흘낏 재키가 화면을 바라 보니 아니나 다를까, 또 게임이다. 재키는 허벅지와 무릎으로 창연의 몸을 옆으로 밀고 소리나게 책상에다 국수 쟁반을 놓았다.재키의 인상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공부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또 게임을 하고 있다니.....
더 이상 잔소리 하기도 지쳤다.
"여기서 먹어. 지금 수연이가 오기로 했어"
"수연 씨가?"
창연은 콧등에 내려온 안경을 고쳐쓰며 놀라는 얼굴을 했다. 게임하는 걸 재키에게 들킨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다. 그는 점점 더 뻔뻔해져 가고 있었다.
"이 비 오는 밤에 수연 씨가 웬일이래?"
"몰라"
재키는 짧게 일갈하고 방문을 탁 닫고 나왔다. 이젠 창연하고 말도 같이 하기 싫다. 아니 쳐다보는 것도, 얼굴을 마주하는 것 조차도 싫다.
재키는 아이에게 국수를 먹이면서 다시 한 번 창 밖을 바라본다.
비는 여전히 세차게 오고 있다.
진짜 얘가 웬일일까. 이 시간에 여길 오겠다니.
밤 방문은 그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에릭하고 사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닐까.
지난 주 통화할 때만 해도 아뭇소리 없던 수연이었다.
쌍동이를 보러 한 번 놀러오겠다는 얘길 하긴 했지만 이렇게 비오는 밤에 예고도 없이 갑자기 온다니. 설마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오는 건 아닐테고.
재키는 수연에게 적쟎은 돈을 빌려쓰고 있었다. 생활비가 모자랄 때마다, 집세를 못 낼 때마다 몇 천불 씩 혹은 몇 백불 씩 꾸어 쓴 돈이 거의 만불을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가 국수를 우물거릴 동안 재키는 대충 바닥을 치웠다. 장난감, 책, 신문 등으로 바닥은 발디딜 틈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무리 절친하다고 해도 수연에게 이런 꼴을 보이기는 너무 창피하다.
수연이 온 건 그로부터 5분 후 쯤이었다.
재키가 단번에 느낀 것은 수연이 허둥대고 있다는 것이었다. 뭔가 모르게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는 듯한. 늘 명랑하고 밝긴했으나 항상 안정적이고 차분하던 수연에게서 전혀 느끼지 못했던 생경스런 분위기였다.
"너에게 할 얘기가 있어"
수연은 재키가 권한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입을 떼었다.
"할 얘기라니? 돈 걱정없고 남편이 속 썩일 걱정이라고는 없는 팔자좋은 사모님께서 이 밤중에 무슨 긴히 할 얘기가 있을까..."
재키가 능글거리면서 말했다.
"어디에 뽕 갈 만한 애인이라도 생긴 건 아닐 테고"
수연이 급하게 재키의 말을 잘랐다.
"......남자가 생겼어........"
재키는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멍한 얼굴로 수연을 바라보았다.
"수연아,지금 뭐라고 했니. 남자가,남자가 생겼다고 했니?"
수연은 우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요즘 너무 힘들어......"
"............"
"입양아야.한국인 입양아.같은 직장에 다녀...."
수연은 숨 쉴 틈 없이 말을 쏟아놓았다.
"수연아....."
"나 보다 열 네살이나 어린 남자야....."
인간이란, 인간이란 이런 동물인가.
등 따시고 배 부르면 자연적으로 한 눈을 팔게 되는 게 인간이란 동물인가.
재키는 자신이 대꾸할 틈도 없이 한꺼번에 다 털어놓고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첫 남편의 끊임없는 바람으로 상처받고 고통받다가 급기야 이혼까지 한 수연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연은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던 바람이 났단다.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가 생겼단다.
"수연아"
재키는 놀라서 벌렁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하면서 물었다.
"그 남자하고 어느 만큼 깊은 관계인데? 둘이서...잤니?"
수연의 눈이 재키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이 말했다. 너는 꼭 잠을 자야만 남녀관계가 성립된다고 생각하는구나....
수연이 천천히 고개를 흔들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아니....잠은 안잤어....
"그렇지만 난 그 남자에게 잔 것 이상으로 깊이 빠져있어. 깊이,아주 깊이......"
재키가 바짝 말라오는 입술에 침을 묻히며 초조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뭐야? 정욕도 아니고.....열 네살 연하라면 모성이야?"
수연이 입술을 비틀며 피식웃었다.
"사랑이야.진짜 사랑...."
"뭐라구?"
"나,그 남자 진짜 사랑해...."
"뭐,뭐어?"
수연아,하고 재키가 숨 넘어갈 듯이 급하게 수연을 불렀다.
"수연아. 너 진짜로 그 남자를 좋아,아니 사랑하기는 하는 거니?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고 내 인생을,그래,아닌 말로 에릭을 버리고, 지금 에릭과의 안락하고 윤택한 생활을 포기하고 그 남자에게 가도 절대 후회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 남자를 사랑하는 거냐구?"
수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는 걸 재키는 보았다.
오! 하나님 맙소사!
재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지만 에릭을 떠날 생각은 없어."
"그러면 어쩔 셈이야. 잠도 같이 안 잔다면서 대체 만나서 뭘하는 건데?지금처럼 계속 에릭의 눈을 피해 그 남자를 만나고 다닐 거니?"
숙여진 수연의 고개가 밑으로 더 내려갔다.
지금까지는 잘 견디고 참아왔지만 언젠가는 일을 내고 말 것이다. 수연의 조금 전 쟌의 격렬하고 뜨겁던 손길을 생각했다.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다. 무너지기 전에 그를 끊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진짜로,진짜로 그와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어떻게 끊나말이다.
"수연아!"
"쟌을 정리하긴 해야지........"
수연이 깊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에서 반짝,하고 눈물이 비쳤다.
"쟌을 만나고 돌아 올 때마다 미쳐버릴 것 같아. 에릭의 얼굴을 보기가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고.....내 자신을 죽이고 싶어. 그의 집에서 돌아서 나올 때마다 늘 생각하지. 오늘이 마지막이다. 다신 그를 만나러 가지 않을 거야.....그런데 다음 날 출근 하면 쟌한테서 이메일이 와 있어. 사랑한다고 보고싶었다고....그러면 지난 밤의 내 굳은 결심은 간 곳 없어지고 마는 거야. 땡볕아래 놓아둔 눈사람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거야. 회사 내만 아니라면,사람 눈만 아니라면 그에게로 당장이라고 달려가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 되지....그렇게 그에 대한 갈망으로 하루를 힘들게 참아내고 퇴근을 하면 바로 그의 아파트로 나도 모르게 달려가고 마는 거야......"
"그 정도니....."
재키는 수연의 눈물에서 그동안 수연이 겪었던 자책과 고뇌와 번민을 본다.
통제하지 못하고 마구 쓸려 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 겪었을 죄책감, 그리고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준 데 대한 자신에 대한 분노와 수치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 만약 이 사실을 에릭이 알게 되면......
강인하고 냉정한 성격의 에릭의 모습이 재키의 머리에 잠깐 떠 올랐다가 사라졌다.
"......에릭은 그 남자에 대해 어느 만큼 알고 있니?"
".............."
재키네 집에 잠깐 들렀다 집에 가겠다고 전화했을 때 무엇 때문에 재키네에 가는 건지, 그리고 언제 돌아올 건지 에릭은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여지껏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리고 오늘 에릭은 일찍 집에 돌아와 있었다. 언제나 수연보다 한두시간 늦게 집에 돌아 오는 에릭이었다.그래서 수연은 그동안 마음놓고 퇴근 후 쟌의 아파트에서 2,30분정도 시간을 보내다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같이 에릭의 이른 퇴근은 굉장이 드문 일이었다.
그는 왜 오늘따라 집에 일찍 돌아왔을까.
수연의 마음이 잠깐 불안으로 흔들렸다. 그때 다시 천둥이 우르릉 울었다.
날씨 때문일 거야. 날씨가 사나우니까 일찍 왔겠지.......
"그냥 직장동료 정도로....같은 한국인이라서 친한 정도로 알고 있어......그러나 언젠가는 알게 되고 말거야. 우리 둘이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아니, 에릭이 알기 되기 전에 난 그 남자랑 선을 넘게 되고 말 것 같아. 그렇게 되면..나....나는 파멸이야...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내 마음이 조정이 안돼. 오늘도 거의 선을 넘을 뻔 했어....이젠 자신이 없어져......"
재키는 입을 벌리고 수연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대꾸를 하긴 해야 하는데 도통 적당한 말이 떠 오르질 않는 것이다.
"재키야. 나 어떻게 해. 정말 어떻게 했으면 좋겠니?"
수연이 재키를 쳐다보고 호소하듯 말했다.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어떻게 해야 할지.....도저히 나 혼자 힘으로는........무슨 방법이 없을까."
"직장을 그만두면 어떻겠니?"
재키가 간신히 한 마디했다. 수연이 놀란 얼굴로 재키를 쳐다보았다.
"직장을 나가는 한 매일 그 남자를 볼 것이고 그러면 네 마음을 정리하기가 힘들어지는 건 당연지사쟎아.안 보면 좀 쉬울 거야.옛말도 있지 않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고......휴대 전화번호도 바꾸고 말이야........"
"그럴까......"
"그래, 그게 현재 최선의 방법같아"
"그런데 직장을 그만두면 우리 부모님한테 매달 부치는 돈은 어떡해...."
"네가 지금 그걸 걱정할 때니?"
재키는 빽 소리를 질렀다.
재키는 왈칵 수연에게 짜증을 느낀다. 이렇게 맹한 여자가 또 있을까.에릭한테 들키는 날이면 부모님한테 부치는 돈이 문젠가. 그동안 누려왔던 편안하고 여유로운 생활이 통째로 흔들릴 텐데.....
수연의 고개가 움추려들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직장을 그만 두는 게, 그를 안 보는 게 지금 이 상태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제일 현명한 방법일 것 같아.....그런데....."
"그래, 잘 생각했다. 내일 당장 사표를 내 버려"
재키의 칼날 같은 말에 수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내일 당장?.....어떻게 그렇게 해...단 며칠 만이라도 그의 얼굴을 더 보고 내면 안될까......
수연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걸 재키는 읽었다. 재키의 입에서 긴 한숨이 뿜어져 나왔다.
문을 닫고 돌아서서 재키는 팔짱을 낀 채 한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답답하고 무거운 심경이었다. 미국에 와서 제일 가깝게 사귀었던 친구가 수연이었다. 둘은 웬만한 비밀같은 건 없이 서로 공유하며 지내왔다. 누가 알면 절대로 안되는 이야기를 털어놓으러 이렇게 비오는 밤 자신을 찾아온 것만 봐도 수연이 자기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재키는 마음이 편치않다.
사회적인 지위도 높고 돈 잘버는 남편을 두고서, 크고 좋은 집에서 일 주일에 한 번씩 메이드까지 쓰면서, 자신이 버는 돈의 전부를 매달 한국의 친정식구들에게 보내도 전혀 개의치않는 너그럽고 인자한 신랑을 두고서 수연이 딴 눈을 팔았다는 것을 재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변호사 수임료 낼 돈 한 푼 없어서 청소를 해주겠다고 사정하던 7년 전의 수연을 재키는 생각해냈다. 그때와 지금 현재의 수연이 갖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재키는 비교해 보았다.
어쩌면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기로서니, 인생의 은인이나 다름없는 에릭을 두고서....머리 검은 짐승은 은혜를 모른다더니......
재키는 집안으로 걸어 들어오다가 현관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자신의 샌달을 발견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그만 끈 한 줄이 떨어져 나가버린, 올 봄 수연이 옷 서너벌과 함께 사 준 샌달이었다. 근 반년 동안 매일같이 줄기장창 신고다녔었는데 오늘 아침 그만 수명을 다하고 만 것이다. 재키는 끈 떨어진 샌달을 신은 자신의 모습에 얼마나 신경이 쓰이던지 화장실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지금 재키에게 새 샌달을 사 신을 만한 금전적인 여유가 전혀 없다. 이달 집세는 어찌어찌하여 겨우 껐지만 아직도 내야 할 각종 고지서가 산더미같았다. 특히 지금 가장 급히 해결해야 할 돈은 쌍동이의 베이비시터비였다. 쌍동이를 맡기던 멕시코 여자가 이제부터 친구를 따라 가정집 청소를 하러다니기로 했다고 했다며 더 이상 아이를 보지 못하겠다고 통보해온 게 그저께였다. 그게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힘도 덜 들고 수입이 낫다고 했다.
바로 서너집 떨어진 집이라 가까워서 좋았고 가격도 낮아 그동안 재키는 아이 둘을 갖다맡기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지금부터 새 베이비시터를 구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동안 멕시코 여자한테 주던 돈으로는 쌍둥이를 맡아 줄 사람이 아예 없다는 것이다.
진짜 어떻게 해야 하지....
정 안되면 시어머니를 다시 부르는 수밖에 없다고 재키는 생각했다.
아아, 그나저나 내일부터 당장 뭘 신고 일을 나가야 하나.
명색이 변호사 사무실이었다. 옷이랑 신발을 대충 구색맞춰 입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그러나 신발장을 뒤져봐도 번듯한 신발 한 켤레가 없는 재키였다.
재키는 수연이 입고 있던 옷을 생각했다. 수연은 언뜻 보기에도 질이 아주 좋은 블라우스와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수연이 반코트를 벗어 식탁의자에 놓을 때 재키는 보았다. 자기 월급의 반 이상을 주어야 살 수 있는 비싼 상표가 붙어 있는 것을.
수연은 일 년에 몇 번 씩 계절이 바뀔 때 마다 아울렛에 직접 가서 유명상표의 옷들을 산다고 했다. 그러나 재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옷을 사 본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아이구, 어떤 년은 팔자좋게 남편 두고 젊은 남자랑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고 어떤 년은 싸구려 샌달 한 켤레 마음대로 사 신지 못하는 신세고......
그동안 단 한 번도 수연을 시샘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을 가져보지 않았던 재키였다. 그러나 수연이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는 얘기에 재키는 자신도 모르게 잔뜩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며칠동안 씻지도 않은 채 수세미같은 머리를 하고서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중늙은이가 아니라 푸른 바다냄새가 풍풍 날 것 같은 남자, 젊고 건강하고 잘 생긴 남자. 내게도 그런 남자가 하나 생겼으면...
재키는 현관 문에 기댄 채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보았다. 아이를 낳은 지 벌써 반 년이 지났건만 그때 찐 살이 아직도 빠지지 않고 있다. 허리는 두리뭉실하고 배는 오랫만에 갔던 미용실 아줌마가 또 임신을 했냐고 경악했을 정도로 불룩 나와 처져 있다.
이렇게 퍼질대로 퍼진 나 같은 여자를 누가 좋아할까. 연애도 몸매가 바쳐주어야 하고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한 표정이긴 했지만 반짝반짝 빛나던, 갓 해 놓은 햅쌀밥처럼 윤기가 자르르 돌던 수연의 얼굴을 재키는 생각했다.
재키는 갑자기 치솟는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진 년이 이제 젊은 애인놈까지 가졌다 이거지?
결혼 후부터 단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지금까지 계속 쪼그라들고만 있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비관, 그리고 앞으로도 쪼그라든 자신의 신세가 전혀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데 대한 절망감이 분노로 표출되는 것을 재키는 느꼈다.
흥, 잠 안 잔 사이 좋아하네....
착하고 순하긴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앙큼한 구석이 있는 수연이 자기한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재키는 생각했다.
잠을 안 자는 남녀 사이가 어디 있어. 잠을 안 자고도 어떻게 그렇게 사이가 깊어 질 수가 있단 말이야. 매일 저녁 아파트에 갔다면서, 그럼 둘은 나란히 손만 잡고 앉아 있었단 말이야,얼굴만 마주보고 있었단 말이야..말이 되는 소릴 해야 믿지...자기네들이 무슨 황진이와 서경덕이라고.....같쟎게......
둘이 잠을 자도 벌써 수십 번은 더 잤을 거라고 재키는 스스로 확신했다.
씽크대에 잔뜩 쌓인 설거지를 보면서 부엌으로 몸을 움직이려는 찰나 천둥이 울렸다.
때 맞춰 안방에서 자던 쌍둥이들이 천둥소리에 놀랐는지 와아,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재키는 창연이 있는 방을 노려보았다. 방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보나마나 뻔하다. 입을 헤 벌린채 아직도 게임을 하고 있을 게다.
거지같은 인간. 귀신도 쓸모없어서 저 인간은 안 잡아가나 봐....
재키는 부엌으로 옮기려던 몸을 돌려 안방쪽으로 가면서 샌달 한 짝을 냅다 걷어 찼다. 샌달이 저만치 날아가서 떨어졌다. 그때까지 혼자서 거실바닥에서 놀고 있던 아이가 불안한 얼굴로 재키를 쳐다보았다.그 아이의 불안한 눈동자를 보자 재키는 눈물이 나려했다.
"괜찮아. 엄마 아빠랑 안 싸워........"
하도 아침저녁으로 싸워대니까 아이의 정서가 갈수록 눈에 뜨이게 불안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 싸우게 해야 안싸우지.....이 더러운 넝마같은 내 팔자.....
재키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쌍동이를 하나 씩 양팔에 안고 거실로 나왔다.
아무래도 이건 너무 불공평 해......
두 쌍동이를 바닥에 눕히고 기저귀를 갈면서 재키는 입술을 깨물었다.
수연의 남자 얘기를 다이앤에게 해 주면 어떨까.
전구에 불이 들어 오듯 재키는 반짝,하고 다이앤을 생각해냈다.
다이앤은 재키가 일하고 있는 사무실의 고참 변호사였다. 오십대 초반의 매력적인 독신녀인 다이앤은 에릭이 잠깐 싱글로 있을 때 연인사이까지 갔었지만 수연이 나타나면서 닭 쫒던 개가 되고 말았다. 그녀가 지금까지 에릭에게 미련을 못버리고 있는 것을 재키는 잘 알고 있다. 수연과 에릭의 결혼생활에 대해 지나가는 말처럼 재키에게 늘 물어보곤 했으니까.
재키는 결심했다.
오늘 들은 이야기를 모두 다이앤에게 털어놓기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