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합니다

 

아침 나절이라 그런지 공원 안에는 사람의 모습이 거의 없었다.

비쩍 마른 동양 남자가 탄 휠체어를 천천히 밀고 있는 늙스구레한 백인 간호원 한 명과 너무 살이 쪄서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고 헐떡거리는 개를 산책시키러 나온 노부부 뿐, 끝이 안보일 정도로 넓디넓은 공원 안은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치치치, 하고 뿜어져 나오는 스프링 쿨러의 물 소리만이 새 지저귀는 소리와 섞여 고즈넉한 공원 안을 가득 메아리치고 있었다.

수연은 분수대 근처에 있는 벤치 하나를 발견하고 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걷고 있는 수연의 구두 위로 어디서 낙옆 하나가 날라 와 떨어졌다.

이제 가을인가.

수연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푸른 물이 와르르 쏟아져내릴 것만 같은 높고 청명한 하늘이 눈 앞에 가득 있다. 하늘은 맑고 푸르기만 한데 지금 수연의 가슴엔 짙고 검은 그늘이 가득 껴 있다.

수연은 하늘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녀는 햇볕이 내리 쬐는 양지 쪽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벤치는 아침 햇살을 받아서인지 따뜻하게 데워져 있었다.

휠체어를 탄 남자와 간호원은 수연이 앉은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휠체어에 탄 남자는 멀리서 보기에도 병색이 완연해보였다. 그는 담요 한 장을 몸에 덮고 있었다. 그의 몸은 방금 수연의 구두 위로 떨어졌던 낙엽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뼈에다 가죽을 갖다 붙힌 듯한 얼굴은 시커멓다못해 푸르스름했다.

저런, 몹씁 병에 걸렸나 봐. 가엾기도 해라.

평소 때의 수연같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마음속으로 동정하고 쾌유를 빌어주었을 것이다.

자신이 분에 넘치는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수연은 물질적으로는 물론 심적으로도 늘 주위사람들에게 넉넉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수연의 가슴은 불안으로 떨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불행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수연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는 것은 혹시나 지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이혼 후 단 한 번도 연락을 취해오지 않던 전남편 상재에게서 만나자는 기별이 왔다. 지미와 연관된 일이 아니면 수연에게 연락할 일이 전혀 없는 상재였다. 그는 결혼 직후부터 수연을 발바닥에 붙은 티눈처럼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수연이 자신을 떠나간 걸 무엇보다 속시원하고 홀가분하게 여기고 있던 사람이었으니까.

상재가 자신을 그러한 존재로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수연 또한 잘 알았다.그래서 그의 전화가 걸려왔을 때 수연은 단번에 그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를 만날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상재는 쉰 목소리로 간곡하고 애절하게, 거의 울 듯 말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시간을 내 줄 것을.

그때 수연의 뇌리를 때리는 것이 지미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지미한테 무슨 문제가 생겼나요?그 아이는 지금 어디 있어요?아직도 한국 할머니한테 있는 건가요?"

수연의 질문에 상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나 보면 알 거라는 짤막한 대답뿐이었다. 수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미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다는 것을.

내가 벌을 받은 게야.

상재와 만날 약속을 하고부터 지금까지 수연의 머리를 짓누르는 생각,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벌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어디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에게 한눈을 판 자신에게 지미를 통해 벌을 내렸다는.

그것은 공포스럽고도 무서운 일이었다.

수연은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기도했다.

제발, 제발, 지미에게만은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죄는 제가 저질렀어요.벌은 제게 내리시고, 죄 값은 제가 받겠으니 제발 우리 지미에게만은 아무 일 없게 해주세요.....

그녀의 기도는 간절했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고는 그냥 배기지 못할 만큼. 수연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수연은 그동안 한 번도 믿어본 적 없는 하나님을 향해 혼심을 다해 빌고 또 빌었다.

기도를 마치고 고개를 드는 수연의 눈에 공원을 가로질러 뛰어 가는 젊은 흑인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몸에 딱 붙는 셔츠와 헐렁한 숏팬츠를 입은 그는 천천히 뛰다 빠르게 뛰다하는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군살 한 점 없는 몸에서 울퉁불퉁한 근육이 솟구치고 있었다.

순간 수연의 머리에 쟌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 쟌의 몸이 저렇게 훌륭했었어. 그의 몸은 저 남자처럼 군살 없이 미끈했지. 마치 잘 빠진 한 마리의 경주마 같았어......

수연은 허공을 향해 눈을 돌렸다. 끝 간 데 없이 훤히 뚷린 하늘처럼 수연의 가슴은 마냥 허허로왔다. 그녀의 가슴은 쟌에 대한 미칠 듯한 그리움으로 바짝바짝 타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얼굴을 못 본 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 한 지가 벌써 며칠째이다.

쟌이 보고 싶어!

수연은 절규 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서 죽는 한이 생긴다해도 일단은 쟌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욕망이 갑자기 수연의 가슴에서 분수처럼 강렬하게 솟구쳤다. 수연은 벤치 옆에 두었던 핸드백을 집어들고 곧 일어설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수연은 엉거주춤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금방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죄 값을 달게 받겠다고 기도를 한지 1분도 지나지 않았다.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다시 죄를 지으려고 하다니, 정녕 이게 무슨 망녕이란 말인가!

그러나 머리를 세차게 흔들고 입술을 깨물어도 한 번 머리에 들어온 쟌의 생각은 쉽게 떠나가지 않았다.수연은 괴로움에 겨워 쓰러질 지경이었다. 공원 안만 아니라면 바닥에 누워 데굴데굴 구르며 통곡하고 싶은 충동을 힘겹게 누르며 수연은 자신의 구두코를 노려보고 있었다.

"수연아....."

생각에 골몰하느라 수연은 누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니, 목소리가 너무나 가늘고 약해서 수연이 미처 듣지못했다고 해야 옳겠다.

"수연아...."

수연은 그제서야 얼른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몇 발자욱 떨어진 곳에서 간호원이 미는 휠체어에 앉아서 빙그레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남자, 그는 바로 상재였다.

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믿을 수가 없어서 그녀는 입을 벌리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람의 모습이 어떻게 저렇게 변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건장하고 튼튼하던 사람의 몸이 어떻게 저런 검불같은 몰골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상재의 모습은 팔십노인이라고 해도 해도 믿을 것 같았다. 바람이 휙, 불면 금방이라도 날아 갈 것 같이 앙상한 뼈와 가죽만 남은 처참한 모습이었다. 종잇장같이 얇고 가벼워 보이는 몸에서 뻗어나온 긴 두 다리는 위태롭게 휠제어에 얹혀져 있었고 팔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휠체어 손잡이에 힘없이 걸쳐져 있었다.

"이,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도대체 어떻게 함부로 몸을 굴렸기에?.........."

수연은 상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그의 발밑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녀는 상재의 손을 움켜잡았다.

아아! 어떻게 이런 무섭고도 놀라운 일이!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던 수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 때는 죽도록 증오하고 저주하던 사람이었다. 꿈에서도 원망하고 미워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금방이라도 먼지처럼 꺼질 듯한 초라한 상재의 모습이 수연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했다. 지금 그녀의 가슴에는 미움과 증오보다 동정과 안타까움이 더했다. 인간에 대한, 그리고 지미의 아버지에 대한.

"미안해.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상재는 그때까지도 자신의 휠체어 손잡이를 잡고 있는 간호원에게 눈짓을 했다. 간호원이 고개를 끄덕,하더니 몸을 돌려 천천히 숲 쪽으로 사라졌다.

"지미 아빠!"

"수연아....."

"왜,왜 이렇게 됐어요? ....도대체 어떻게....어,어떻게 이 지경이 된 건가요. 지난 번 재키가 안색이 안좋더란 이야길 하긴 했지만......."

"암에 걸렸어.....폐암 말기야......"

"폐,폐암 말기!"

수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폐암 말기라니! 그래서였구나, 그 쉰 목소리가! 그렇다면 이 남자는 앞으로 죽을 거란 말인가! 아,하나님!

수연의 눈에서 펑펑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 흘러내린 눈물이 상재가 덮고 있는 담요로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상재는 떨리는 손을 수연의 얼굴에 갖다댔다. 그리고 그의 손이 흘러넘치고 있는 수연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수연아. 그,그만 울어...나...나 금방 병원으로 돌,돌아가야 해. 담당의사에게 사정사정해서 겨우 한 시간을 얻었거든. 지..지금 우리에겐 남은 시..시간이 많지 않아......"

"............."

"너,너에게 꼭 하....할...할 말이 있어서......."

"..........."

상재는 목이 메이는지 먼 하늘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지,지미를......"

눈물이 묻어 축축해진 상재의 손이 수연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는 말 몇 마디 하는 것도 힘에 부치는지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지미를 잘...잘 부,부탁해......."

"지,지...지미 아빠!....."

"미안해,수연아......."

"상,상재 씨!"

수연은 외마디 비명처럼 상재의 이름을 불렀다. 지미를 임신한 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상재의 이름. 한 아이의 아빠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강조하기 위해서 그녀는 늘 상재를 '지미 아빠'라고 불렀다. 그 노력이 허사이긴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이라고 했던 이모의 한정식 집. 고기 굽는 매케한 연기속에서 수연의 푸른 청춘이 몇 년간 시둘고 있을 때 짠, 하고 나타나 수연을 구제해 준 사람이 상재였었다.

상재는 생긴 것도 생긴 거지만 누구나가 한 번에 반할 만한 화술의 소유자였다. 특히 그가 영어를 섞어 가며 미국 정치라던지 미국사회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수연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가정형편 때문에 시골에서 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는둥 마는둥 했던 수연은 늘 새로운 지식과 학식에 목말라 있었다. 그러한 수연에게 중학교때 유학을 가 서양학문을 접하고 미국 본토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상재는 태양처럼 찬란한 존재였다. 선을 보자마자 상재에게 빠져버린 것은 어쩌면 수연에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카라는 이유로 월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던 이모는 수연이 상재와 결혼한 후 미국에 오게 됐을 때 자기 공인양 공치사를 했다.

"상재 어머니가 어디 참한 색시감 없냐고 중매를 요청했을 때 내가 너를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어디 언감생심 재미교포와 결혼을 다 할 수 있었겠니? 미국가더라도 내 은혜 잊어버리면 넌 사람도 아니야"

그러나 수연은 미국에 온 후 이모에게 변변한 편지 한 장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편지라는 것은 생활이 평안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수연은 미국땅에 발을 딪자마자 크나큰 고통과 상처에 늘 시달려야 했었다. 단 하루도 쉬지 않는 상재의 바람때문이었다.

그런대로 돈을 잘 버는 능력과 훤칠한 외모를 가지고도 미국에서 결혼을 하지 않고 한국땅에서 신부감을 찾았던 건 상재의 어머니때문이었다. 상재의 어머니는 아들의 선천적인 바람기를 알았다. 그녀는 아들의 바람기를 잘 감당해 가정을 잘 꾸려나가고 대를 이을 자손을 낳아 줄 조신하고 착한 여자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남자 어머니가 사십이 다 되도록 미국에 혼자 떨어져 있는 아들 땜에 보통 걱정이 아니란다. 이왕이면 세상의 때가 덜 묻은 시골출신 아가씨를 원한다니 네가 딱 적격이네. 남자들 바람기야 다 있는 것이니 여자가 노력만 잘 하면 고쳐질 수 있을테구....."

이모의 말대로 수연은 자신만 잘 하면 상재가 고쳐질 줄 알았다.

아이를 낳으면 괜찮아 질거야.

친구 한 명 없는 곳에서, 영어 한 마디 못하는 바보라는 자괴감속에서도, 운전을 할 줄 몰라 간장 한 병을 사기 위해 두 시간 거리를 걸어다니면서도 수연이 놓지 않았던 희망의 끈, 그것은 언젠가는 상재가 바뀔 거라는 것이었다. 좋은 사람으로,그리고 좋은 남편으로.

그러나 그의 바람기는 지미를 낳고도 가라앉을 줄 몰랐고 마침내 사촌동생을 범하는 데로까지 치달았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봐 줄 만하다. 이혼을 하면서 상재가 보여준 비열함에 비하면. 수연이 상재에게 치를 떨며 증오의 감정을 키우게 된 것은 이혼을 하면서였었다.

수연에게서 양육권을 빼앗고저 그는 수연이 단 한 번 카운셀러에게 우울증 상담 받은 케이스를 중증의 우울증과 정신병으로 집요하게 몰아부쳤다. 그리고 그는 집과 재산을 치밀하고 교묘하게 빼돌려버렸다. 10년 가까히 결혼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연은 빈 손으로, 그야말로 일 전 한 장 가진 것 없이 빈 손으로 상재로부터 쫒겨난 것이다. 그게 벌써 7년전의 일이다.

"어떻게 해요..어떻게....."

수연은 차마 다른 말이 나오지 않아 눈물을 흘리면서 계속 같은 말만 반복했다. 상재를 쳐다보는 그녀의 눈엔 죽음을 목전에 둔 전남편에 대한 연민과 동정이 가득 배어 있었다.

"수연아......"

상재 역시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수연을 쳐다보았다. 눈이 천리나 쑥 들어가고 움푹 패인 볼이 미이라 같은 형상이었지만 수연을 쳐다보는 상재의 눈빛만은 형형했다. 수연은 상재의 깊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너,너를 진..진작에 만나려고 했었어..그..그런데 차마 양심이 허,허락치 않더군...."

"............."

"그,그런데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시간과 여...여유가 남..남아있지 않아....수.. 수연아....나를......"

상재는 말을 멈추고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만큼 괴롭게 기침을 했다.수연은 저러다가 숨이 멈춰버리는 건 아닐까 겁에 질려 상재를 바라보았다. 기침소리를 듣고 간호원이 달려왔으나 상재는 손짓으로 간호원을 다시 보냈다. 상재는 숨을 몰아쉬면서 띄엄띄엄 입을 열었다.

"수,수연아. 나를 용서해 줘...너 한테 내...내가 한 짓, 용서해 줘...정,정말 미안했어. 정말 미...미안했어......."

수연은 상재의 손을 움켜잡았다.

"너..너를 떠나보내고 다시 몇몇 여자와 살...살림을 차리고 살았지. 한 여자완 결혼까지 했었어. 그러나 그들은, 그들은 나를 진..진정으로 사랑한 게 아..아니었어. 우,우린 그냥 서로를 이용했을 뿐이지. 무...물....물질적으로 육체적으로.....내.. 내가 암에 걸린 걸 알았을 때, 그리고 내 생..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통보받았을 때 지...지...난 날을 반추하면서 진정 깨달았어.내 평생에 나를 진...진...진정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은,그리고 깊은 사랑을 준 사람은 수...수연이,너 뿐이었다고. 그후 내가 어...얼...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몰라. 가슴을 져..져며오는 후회때문에. 밤...밤...밤낮으로 후회하고 후회했어. 너에게 정말 못할 짓을 많이 했다고........"

"............"

"수연아..너무 염치 없고 미,미안하지만 지미를 맡아 줘...한...한국에 어머니도 요즘 건강이 많이 안좋아지셨어.지미를 키울 형편이 안돼. 어머닌 지미를 여동생에게 맡...맡긴다고 하시는데 그 애 성...성격을 내..내가 누구보다 잘....잘 알거든...."

".............."

"사...사실은 몇 년전부터 지...지미를 데려 오려고 했었거든. 외국인 학교다니며 미국에 잠깐씩 다...다녀가는 게 영..영어 습득에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서...그런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그..그만 이,이렇게 되고....되고 말...말았어...."

"..........."

상재는 자신의 무릎을 덮고 있는 담요 밑으로 갈퀴같이 앙상한 손을 넣더니 봉투 하나를 꺼냈다.

"내 전 재산이야....지...지미를 잘 ...잘..부탁해"

"상재 씨!"

수연이 통곡하며 상재의 무릎으로 쓰러졌다.그런 그녀를 상재는 비통한 눈으로 내려다 보았다. 수연의 통곡 소리에 놀란 간호원이 멀리서 달려왔다. 그녀는 수연이 상재의 무릎에 엎드려 울고 있는 걸 보더니 잠시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갈 시간이야"

간호원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뚝뚝한 소리로 말했다.그녀는 상재의 뒤로 돌아가더니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수,수연아!"

"상재 씨!"

"한...한국 가거든 정...정희를 꼭 만나......"

눈물로 번들대는 얼굴을 수연에게 돌리며 상재가 말했다. 정희는 수연의 사촌동생이었다.

"내...내가 그..그...그러더라고...정...정.정말 미..미안했다고 전해 줘......"

수연은 상재를 실은 밴이 떠나는 걸 보면서 한참을 더 울었다. 오십도 채 안된 나이로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상재가 불쌍해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는 수연이었다.

그녀가 회사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녀의 슈퍼바이저가 도끼눈을 치켜 뜨고 뭐라고 하려다가 수연의 퉁퉁 부은 눈을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수연이 막 자리에 앉았을 때 기다렸다는 듯 책상위에 놓인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수!"

수연이 수화기를 들자마자 에릭의 다급한 목소리가 속사포처럼 흘러나왔다.

"휴우,이제야 가까스로 통화가 되었군. 수, 당신 괜찮은 거야? 왜 휴대전화를 받지 않는 거지?"

그제서야 수연은 아침에 상재의 전화를 받은 후 휴대 전화기를 꺼놓았다는 걸 상기했다.수연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미,미안해요, 에릭...."

목 놓아 운 탓으로 수연의 목소리는 잠겨져 있었다. 그걸 그냥 지나칠리 없는 에릭이었다.

"당신 목소리가 왜 그래?운 거야?아침에 내가 냉랭하게 대해서 당신 속상해서 운 거야?"

"아..아니예요..."

"수! 미안해, 수! 정말 미안해.....내 사과를 받아 주겠어?"

"에,에릭......."

에릭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과하는 뜻으로 당신하고 여행을 떠나고 싶어. 당신 직장 내일이면 그만이지?다음 월요일 자로 하와이 가는 비행기 표를 예약했어.가까운델 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어.이왕 떠나는 여행이니 멀리로 갑시다.나도 일에 너무 지쳤고 말이야.수, 왜 말이 없지?당신 지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계속-

 

1월 15일에는 완결작 '바람이었나' 가 이어집니다.

          

   이계숙의 더 많은 작품은 http://kyesook.com 로 오셔서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