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었나

수연은 방안을 둘러보았다. 달라져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다. 하긴 옷 몇 벌 챙겼다고 달라져 보일 방이 아니다.

안방은 크고 넓었다. 킹 사이즈 침대와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테이블, 그리고 화장대가 놓여진 방 안은 침대 서너 개를 더 들여 놓아도 공간이 남을 만큼이다.

에릭과 살기 시작한 한동안 수연은 밤에 깨어 화장실을 갈 때마다 잠깐씩 헤매곤 했다. 잠결이기도 하지만 너무 넓은 방의 방향감각을 못잡아서이기도 했다.

수연은 다시 한 번 방안을 둘러보았다. 앞으로 다시는 못 보게 될 방을 마음에 깊이 새겨두려는 듯이.

트렁크를 끌고 방을 나오려던 수연의 눈길이 화장대에 위에 올려져 있는 보석함으로 갔다.

그녀는 트렁크를 방 입구에 세워놓고 보석함이 있는 화장대로 걸어갔다. 나무로 된 보석함은 열쇠로 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수연은 단 한 번도 열쇠를 채우지 않았다. 집에 사람이 없을 땐 알람 시설이 집을 잘 지켜주었으니까. 그리고 일 주일에 한 번 오는 파출부는 늘 수연이 집에 있는 휴일에만 왔으니까.

수연은 보석함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뜨인 건 다이아몬드 반지였다. 에릭이 결혼기념으로 사 준 다이아몬드 반지. 수연은 그 다이아몬드 반지의 가격이 얼만지 모른다. 몇 만불을 호가하리라는 것만 짐작할 뿐.

에릭이 수연을 데리고 간 보석상에는 에릭의 친한 친구라는 주인이 직접 나와 있었다.그는 쭈뼛거리는 수연을 위해 직접 커피를 갖다주는 등 최상의 서비스를 해 주었다. 수연이 처음 고른 것은 포도주 빛의 가네트 반지였다.아무 장식도 없이 팥알 만한 가네트 알만 덜렁 박혀있는. 그 반지를 골랐을 때 에릭과 주인남자가 서로 쳐다보며 잠시 아연해 하던 것을 수연은 눈치채지 못했다. 에릭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보석상 주인에게 눈으로 말했다.

봤지? 이런 여자라구.....

몇 만불을,몇 십만불을 호가하는 수 많은 반지 중 몇 백불짜리 가네트 반지를 고른 여자가 수연이었다. 수연이 일부러 에릭의 마음에 들기위해 그런 건 아니었다. 가난한 농삿꾼 딸로 자라나 사치와 담을 쌓은 수연은 보석에 대한 안목이 아예 없었다. 상재와 결혼할 때도 시어머니가 물려 준 황금 쌍가락지가 패물의 전부였으니까. 그녀가 가네트 반지를 고른 것은 붉은 포도주 색깔과 심플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였다.

수연에게 마음을 빼앗긴 에릭은 수연의 그런 모습마저도 사랑스러웠던 것이다. 그날 수연은 자신이 고른 가네트 반지 외에도 에릭이 직접 고른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다. 수백개의 깨알같은 다이아몬드가 새끼 손톱만큼 큰 다이아를 감싸고 있는, 태양을 연상시키는 모양의 반지였다.

수연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내서 손가락에 꼈다. 서너번밖에 끼지 않은 다이아몬드 반지는 실내에서도 여전히 눈이 부실 정도로 영롱하고 찬란한 광택을 내고 있었다.수연은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다색처럼 푸른 사파이어 반지를 꺼내 손가락에 껴 본다. 에릭은 수연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 때마다 갖가지 보석을 선물하곤 했다.

에릭과 결혼 전까지는 싸구려 실반지 하나 자신의 손으로 사 본 적 없고 껴 본 적 없는 수연이었다.그런 그녀가 보석의 가치를 알리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는 에릭이 사다 주는 비싸고 화려한 보석반지들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 어떤 비싼 보석을 사다주어도 심드렁해하는 수연을 에릭은 매우 놀라와 했다.

와아,이것 참 새로운 발견인데. 보석에 관심없는 여자가 다 있다니!

수연은 보석함의 반지와 목걸이를 일일이 다 껴 보고 걸쳐 본 후 보석함 두껑을 닫았다.

이제 이건 내것이 아니야.

원래 별 애착이 없던 것들이었다. 이제 다 두고 떠난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응접실로 나온 수연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소파에 앉았다.

쟌에게 전화를 해 볼 작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그리고 사랑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쟌에게 전화를 걸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은 절박하고 절실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수연은 행동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망설였다. 그에게 전화를 하는 게 잘 하는 짓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이다 .

수연은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면서 쟌에게로 향하는 버튼을 누르는 대신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보았다. 마악 겨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빈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잎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들이 거기 있었다. 회색빛 하늘은 금방이라도 비를 한바탕 뿌릴 것 같이 음산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텅 빈 하늘에 쟌의 얼굴이 아스라히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은 수연은 보았다. 쟌과 보냈던 시간들이 간 밤에 꾼 꿈처럼 수연에게 아득하게 느껴졌다. 사랑해요,수연, 하고 봄바람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던 목소리와 수연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던 쟌의 손길은 지금도 바로 옆에서 느껴질 만큼 생생하기만 한데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죽을 만큼 빠졌었는데 작별 인사도 없이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는 게 수연은 믿어지지가 않았다. 어차피 맺어지지 못할 관계였으니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된 게 잘 된 일인 것 같기도 했지만 지금 수연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 것은 쟌을 향한 뜨거운 그리움이 아직도 식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연은 다시 전화기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십여분 동안 전화기를 노려보기만 하던 수연은 전화를 끝내 하지 못하고 만다. 수연은 중얼거렸다.

그래,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어.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었어. 세차게 나를 흔들어 놓긴 했지만 끝내 머물지는 못하는 바람.....한 번 스쳐가면 그것으로 끝나야 하는 바람.....다신 되돌아 오면 안되는 바람......

수연은 눈을 감았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그녀는 얼른 액정화면을 보았다. 재키였다.

"수연아....."

"재키구나......."

"오늘 떠난다면서?....."

"으응........"

전화기 속에서는 한참동안 말이 없다.

"수연아"

한참 후 재키가 떨리는 목소리로 수연을 불렀다.

"미안해, 수연아. 정말 내가 잘못했어........"

재키는 수연이 에릭의 곁을 떠나는 것이 자신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연과 쟌과의 관계를 다이앤에게 고해바쳤기 때문에 에릭과의 사이에 문제가 생겨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이앤이 그날로 에릭에게 다 이야기 해 버릴 줄 몰랐어.정말 몰랐어.다이앤의 입이 그렇게 가벼운 줄 알았다면 절대로 다이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야....."

".........."

"수연아. 다 내 잘못이야.다 나 때문이야........"

재키는 가늘게 숨을 죽여 울기 시작했다.

수연은 말 없이 전화를 끊었다.

잘못은 내게도 있다,하고 수연은 생각했다. 아무 생각없이 재키에게 쟌과의 일을 털어놓아버렸으니까. 세상엔 비밀이란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재키에게 털어놓지 않았더라도 결국 에릭은 눈치채고 말았을 거라는 것을 수연은 알았다. 아니 끝내 에릭이 눈치채지 못했다하더라도 양심 때문에라도 수연은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수연이 에릭의 곁을 떠나리라 결심한 것도 결국 양심때문이었다. 에릭은 자신을 다 용서하고 예전처럼 돌아기기를 원했지만 수연의 양심이 용납치 않았다. 평생동안 내색을 않는다는 약조를 에릭이 해준다 해도 수연은 자신이 없었다. 남편을 두고 한 눈을 팔았다는 올가미를 자신 스스로 목에 걸고 평생동안 옥죄어 대며 괴로와하고 자책해 될테니까.

그리고 내겐 지미를 돌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어.

수연은 중얼거렸다.

상재는 수연을 만나고 돌아간 일 주일 후 세상을 떠났다.지미는 이제 수연의 몫인 것이다.

"지미를 데리고 와."

에릭이 말했다.

그러나 그건 수연이 원하지 않는 것이다.

빈 몸뚱아리로 들어 와 7년을 빌붙어 산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데려올 수 없는 노릇이니까. 더구나 에릭은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설사 에릭이 지미를 친자식같이 대해주고 키워준다해도 수연은 선뜻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에릭과 살면서 늘 느꼈던 불편한 감정, 그것은 잘 느껴지지 않다가도 걸음을 걸을 때마다 발을 괴롭히는 신발속의 작은 돌멩이 같은 것, 손가락 끝에 박힌 솜털같은 가시같은 것이었다. 에릭이 싫어하므로 단 한 번도 김치를 당당하게 식탁에 올려놓고 먹지 못하고 살았던.

수연은 결혼생활 내내 에릭을 거슬리지 않게 하기위해 늘 노심초사해야 했고 눈치를 봐야 했다. 늘 수혜만 받는 입장인 수연으로서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연은 그런 사소한 것에서 늘 느꼈다. 자신은 결코 에릭과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에릭에게 항상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 수연은 그런 느낌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그런 느낌을 지미에게까지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지미를 자신만의 힘으로 떳떳하게 키우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수연은 쟌에게 전화하는 것을 단념했다. 그리고 그녀는 대신 에릭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었다. 기다리고 있었는지 신호가 가자마자 에릭이 전화를 받았다.

"아직 떠나지 않았군"

에릭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렇지않아도 전화를 하려고 했었지. 벌써 떠난 줄 알고 걱정했었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몇 시 비행기라고 했지?"

"오후 세 시 반이요?"

"택시를 불렀다고?"

"예...."

수연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택시가 오려면 아직 삼사십 분은 더 있어야 한다.

"미안하군. 공항에 내가 데려다 주어야 하는데......."

에릭은 진심으로 미안한 목소리로 수연에게 말했다. 반 년을 넘게 끌어오던 억만장자의 이혼 마지막 재판 날이 공교롭게도 바로 오늘 오후인 것이다.

"수......."

에릭은 한동안 말을 잇지못했다.

"건강해야 해......"

"당신도요......."

"잘 가......."

"예에......."

"수!"

에릭이 갑자기 큰 소리로 수연의 이름을 불렀으므로 전화를 끊으려던 수연은 움찔,몸을 떨었다. 에릭은 큰소리로 수연을 부를 때와는 반대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지 돌아 와. 알겠지?"

"예에......."

수연은 모기소리만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수연은 알고 있었다. 지미와 둘이서 살아가는 일이 아무리 험난하고 어렵다해도 다시 에릭에게 돌아오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게 다야?"

쟌으로부터 벽시계를 건네받으며 알렉스가 물었다. 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했다. 워낙 단촐하고 간단한 살림이라 이삿짐이라고 할 것도 없었으니까.

"친구들 이사를 많이 도와줘봤지만 이렇게 간단한 이사는 첨이군"

알렉스가 휘파람을 불며 벽시계를 픽업 트럭에 실었다.

"대충하지 말고 밧줄로 단단히 묶어. 여기서 서너시간은 운전하고 가야하는데 가다가 바람에 날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쟌은 팔짱을 끼고 기숙사 사감선생처럼 알렉스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미덥지 못하다. 늘 공중에 붕 떠 있는 것 같이 산만하고 어수선한 아이니까.

알렉스는 쟌과 한 살 차이의 동생이었다. 같이 자랄땐 치고박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철이들면서는 누구보다 쟌의 외로움을 잘 이해하는 동생이었다.알렉스가 눈을 찡긋하면서 말했다.

"염려말고 맥주나 한 병 꺼내 따 놓으셔. 금방 끝 날테니......"

쟌은 집안으로 들어왔다. 살림살이가 모두 치워져버린 방안은 넓고 휑등그레했다.

부엌으로 간 쟌은 카운터에 놓아둔 여권과 비행기 표를 쟈켓 안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지금 그는 한국으로 떠나는 길이다.

한국의 생모를 찾은 것이다.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은 옷의 얼룩처럼 늘 쟌의 가슴에 남아 있던 생모에 대한 그리움. 그 그리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측은하게 생각한 것은 양어머니였다. 양어머니는 쟌이 철이 들자마자 여자들에게 빠져들기 시작한 게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해소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몇 년 전부터 한국에다 꾸준히 수소문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으로부터 쟌의 생모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얘, 쟌아. 네가 생각한 것처럼 네 엄마가 너를 일부러 버린 건 아니란다...."

쟌이 가지고 있는 생모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을 누그러뜨리고 좋은 만남을 갖게 하기 위해 양어머니는 애를 썼다.

그러나 쟌은 기억한다. 북새통 같던 시장,사람들의 혼잡한 틈을 이용해 슬그머니 놓아버리던 엄마라는 사람의 손.

그러나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수연을 만나면서 생모에 대한 원망이나 그리움은 그동안 많이 희석되었으니까.

어쨌든 그는 회사에 사표를 냈다.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은 것이다.

쟌은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두 병을 꺼냈다.

짐을 다 실은 알렉스가 집안으로 들어와 부엌 수돗물에 손을 씻으면서 말했다.

"어때?"

"뭐가?"

"태어난 곳으로 다시 가는 기분이 말이야. 그리고 생모를 만나게 된 소감이.어떻게 생긴 사람일까 매우 궁금할 것 같은데....."

"글쎄...."

지금 그는 큰 기대와 설레임으로 당연히 들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쟌의 마음은 놀랍게도 별 감흥없이 담담했다. 생모를 만난다는데 대한 기대가 약간 있긴 했지만 쟌의 가슴은 겨울 벌판처럼 허전하고 쓸쓸하기만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을 느껴본 여자, 수연이 살고 있는 이 고장을 떠난다는 게 쟌으로 하여금 우울한 마음을 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잠시 후 이곳을 떠난다. 끝내 수연을 만나지 못하고. 오늘 떠나고 나면 그는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 돌아 올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수연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평생 살아가야 할 것이다......'

쟌은 병마개를 딴 맥주를 알렉스에게 건네면서 생각했다.

'어쩌면 그 그리움은 세월이 갈수록 더 짙어질지도 모른다......'

수연에 대한 그리움은 지금 그의 가슴에 검은 점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수연에 대한 사랑의 감정과 미련은 어느정도 접었지만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지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쟌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조금 전에 사다 냉장고에 넣어 둔 맥주는 미지근하고 쓰기만 했다.

수연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싶다,하고 쟌은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걱정을 많이 하셔. 생전 처음 가보는 한국인데 잘 적응하지 못하면 어떡하냐고...."

알렉스는 미지근하고 쓴 맥주를 별 말 없이 마시면서 말했다.그의 눈빛 역시 쟌을 걱정하고 있었다.

"짧은 방문인데 적응하고 못하고가 어딨어...."

쟌은 입꼬리를 끌어올려 억지로 웃어보이며 알렉스에게 말했다.

"아빤 자기라도 같이 같이 따라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하여튼 마음이 안 놓이나 봐"

알렉스의 말에 쟌은 가슴을 쭉 펴보였다.

"내 나이가 몇살이냐. 그런 걱정일랑 안해도 되는데......"

"얼마나 있을 예정이야?"

"글쎄,이 주일?한 달? 아직 잘 모르겠어. 바삐 돌아와야 할 이유도 없고......"

"돌아 와서 다시 학교에 갈 거야?"

"그래야지........"

쟌은 자신없이 대답했다. 지금 쟌에게는 생모도 학교도 별 의미가 없다.수연을 빼놓고는 특별하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쟌에게는 지금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무슨 말을 해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쟌이 이상했던지 알렉스가 입을 다물었다.

둘은 빈 방의 벽에 기대어 서서 묵묵히 맥주를 마셨다.

쟌의 휴대전화 벨이 울린 것은 쟌이 맥주 한 병을 다 비우고 나서였다.

에이미였다.

쟌은 알렉스에게 눈짓을 했다. 알렉스는 알았다는 듯이 눈을 껌뻑하더니 냉장고에서 맥주 한 병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갔다.

"에이미..."

"오늘 떠나는 건가요?"

에이미의 목소리에 축축하게 물기가 묻어 있었다.

"음......"

"미안해요..당신 떠나는 걸 보고싶었는데.....당신이 싫어할 것 같아서......."

"............"

"다시는.. 다시는 이 지역에 돌아오지 않을 거예요?"

아마 그렇겠지...다시 이곳에 돌아 올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까.....

쟌은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럴 거야.....잘 있어...에이미...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작별이란 어쨌든 가슴 아픈 일이다. 쟌은 에이미에게 인사를 하면서 목이 메는 것을 느꼈다.

사랑스런 여자여. 부디 행복하길.....

에이미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말했다.

"저를...저를...잊..잊지 말아 줘요.....그리고 약속해 줘요. 나중에, 세월이 가고 마음이 바뀌게 되면 언제든지 제게 연락을 주겠다고, 그렇게 약속해 줘요....."

쟌은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미는 지금 쟌이 한국으로 떠나는 것을 모르고 있다. 쟌의 지금 심경은 한국에가서 영원히 돌아오지 말아버릴까 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견디기가 좀 쉬울지도 모른다. 수연과의 기억이 전혀 없는 곳이니까.

"에이미......."

에이미는 전화기 속에서 한참을 훌쩍거렸다. 쟌은 에이미가 진정하길 기다리며 묵묵히 전화기를 잡고 있었다.

에이미가 불쑥 물었다.

"수연 언니 소식은 들었나요?"

".....아,아니,전혀......"

쟌은 짧게 대답하면서 맞은 편 벽을 응시했다.

아무 것도 없는 하얀 벽에 수연의 동그란 얼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가슴 깊이 아려오는 슬픔을 느끼며 쟌은 눈을 감았다. 수연, 수연이란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싸하게 아파오는 것이다. 수연의 얼굴만 떠올려도 슬픔이 물결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 그러나 앞으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사람......

"쟌... 그만 단념 해요..수연 언니를 단념해요....."

".............."

".....수연 언니, 한국으로 떠난다고 했어요......"

"뭐, 뭐라구?"

쟌은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는 전화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수연이 한국엘 간다고?!"

"예, 그랬던 것 같아요......"

"언...언제,언제 떠난다고 했지?"

"글쎄, 잘 기억이 안나요........"

"에이미!"

"곧 간다고 하긴 했는데 날짜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꾀 많은 사람은 가끔 자기 꾀에 빠져버릴 때가 있다. 지금 바로 에이미가 그꼴이었다. 수연이 한국으로 떠나버렸다고 하면 그녀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접을 것으로 예상하는 에이미였다. 에이미가 쟌에게 전화한 것은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수연이 한국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에이미는 쟌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끝내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수연이 한국으로 간 걸 알면 쟌도 조금씩 진정이 되겠지.한국으로 쫒아가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면 쟌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내게로 오려나. 내가 그의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으려나....

그러나 에이미의 말은 쟌의 수연에 대한 그리움에 불을 지핀 꼴이 되었다. 쟌은 에이미가 뭐라고 더 이야기 하려는 것을 막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는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알렉스!알렉스!"

알렉스가 트럭에 기대어 맥주를 마시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떠나자! 지금, 빨리!"

"아직 비행기 시간 많이 남았쟎아?오후 세시 반이라고 하지 않았어?"

"나 공항 데려다 주고 너도 얼른 집에 가야하쟎아. 부모님이 걱정하실라. 오후 늦게 비도 온다는데......"

공항에 빨리 도착한다고 해서 한국으로 빨리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쟌은 마음이 급했다. 가서 기다리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공항에 가 있어야만 할 것 조급한 생각이 들어서 발을 땅에 부치고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쟌은 허둥대며 트럭의 조수석에 올라 탔다. 알렉스가 쟌의 행동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그는 마시던 맥주를 땅에 쏟아버린 후 꾸물거리며 트럭에 올랐다.

"그나저나 너 운전 괜찮겠니? 맥주를 두 병이나 마셨는데?"

"걱정 마. 내 적정량은 맥주 열 병이니까"

알렉스는 휘이익, 하고 경쾌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 그는 곧 부르릉, 시동을 걸고 차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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