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내려온 한 청년이 있었다.  휴전이 된 후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자 그는 용감하게 미국 행을 했다.  한반도가 어수선 했던 1953년이었다. 

지난 55년 동안 그의 미국생활은 수학 공부로 시작해서 수학 연구로 계속 되었다.  어릴 적부터 수학을 좋아하신 줄 알았는데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 와서 언어의 장벽을 느끼자 언어보다는 숫자로 공부하는 과목을 선택한 것이 바로 수학 계에 발을 들인 계기가 되었단다. 

박사학위를 받은 후 여러 대학에서 가르치시다가 1974년에 이곳 앨라바마 주립대학에 정착했다.  그는 대학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평생을 외골수로 수학 연구에 몰두했다.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수학의 논리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한 그는 23년 동안 한 동료와 함께 복잡한 수학의 방정식에 집념했다.  그리고 컴퓨터 코딩이 해설된 기존의 논법이 그릇되었음을 증명했다.  이 연구 결과는 수학 계의 지대한 관심과 찬사를 받았으며 몽고메리 신문의 일면에 크게 보도되었다. 

멕스웰 부대에 근무할 때 신문에 크게 실린 이 뉴스에서 그의 한국 이름을 읽고 같은 한국계로서 참 자랑스러웠다.  그 당시 나는 한인교회도 다니지 않고 지역 한인들과 별로 친분 없이 지내던 시절이었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그 후였던 것 같다.  그는 작은 체구의 여자인 내가 군복을 입은 것을 신기해 하면서 내 계급 호칭으로 나를 부르곤 했다.  그 후 그의 사진은 몽고메리 공항의 출구에 있던 앨라바마 주립대학을 소개하는 광고에 크게 실려서 이곳 한인들의 위상을 높여 주었다. 

그는 한글의 놀라운 가치를 수학적으로 논증했다.  자음과 모음을 수학방식으로 오묘하게 풀어 한글의 우수성을 증명한 그의 연구 책자에 나는 경탄을 했었다.  그 책은 모국에 대한 그의 사랑의 결정체였다.  그 외에도 그는 150이 넘는 수학 연구 논문을 여러 지면에 발표했고 책도 8권이나 발간했다.  숫자 개념이 희박한 나한테 숫자를 통찰했던 그는 늘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는 한가지 일에, 좋아하는 수학 풀이에 평생을 바쳤다.  그러나 수학 계의 천재연구가로 알려진 그도 한가지 풀 수 없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한반도의 상황이었다.  고향을 자유롭게 찾아가서 가족 친지들을 맘껏 만날 수 없었던 그의 빈 가슴을 그는 이곳에 온 동포들로 채웠다.  그는 언제나 웃음기가 담긴 맑은 목소리로 주위 한인들에게 관심을 주었다. 

그는 몇 명 되지 않던 한인들을 모아서 1979년에 몽고메리 한인회를 세웠다.  그는 뭉치면 산다는 신념으로 한인들의 자리잡음을 돕고 그리고 이민생활의 애환을 다독여준 정신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또한 이곳 남부에 한국을 소개하는데 열성이었으며 앨라바마 주가 한국의 대기업을 유치하는 일도 열심히 도왔다.    

몇 년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시다가 지난 목요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그를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 한인사회에 충격이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생의 순환보다 더 큰 의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바로 한반도의 정세와 지난 수 십 년 한국인들이 겪었던 역사의 굴곡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전쟁을 겪은 세대와 전쟁을 이야기 하는 세대의 대물림을 했다.  모여 앉아서 이 땅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그의 삶을 추모하며 생전에 그가 절대적으로 믿었던 ‘조국은 하나다’ 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장례미사를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그를 사귀어온 한 지인이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그분께 들려 드리자고 했다.  분단된 조국의 아픔에 누구보다도 한 맺힌 삶을 사신 분이라 그 노래는 적절한 경의의 표현이었다.  성악을 전공한 한인이 커다란 성당이 울리도록 부른 그 노래는 모두의 가슴에 애절하게 담겨서 그와의 작별을 도왔다.  장례미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 이 땅에서의 그의 삶을 이야기 하며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제 김기항 교수님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고 편히 쉬신다.  지금쯤 그립던 부모와 가족 친지들과 해후하고 북한에서와는 달랐던 그의 미국 생활을 이야기 할 지도 모른다.  며칠 동안 ‘그리운 금강산’ 노래를 줄기차게 들으면서 나는 그가 생전에 보여준 긍정적인 삶의 자세와 지혜를 회상했다.  그리고 그 동안 남부에서 맺은 그의 가족과의 아름다운 인연을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