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모국을 방문하면 사람보다 빠르게 변하는 환경에 숨이 가쁘곤 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나는 낯 익었던 거리의 변화에 새롭게 적응해야 했다. 

예전에 내가 즐겨 찾던 곳들이 그대로 있다면 추억에 휘몰려 연연해질 테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확 변해 버린 환경이라 오히려 초연해 지는 지도 모르겠다.  서울 시가지에 넓었다고 생각했던 도로들이 좁아 보인 것은 도로 양쪽에 우수수 올라선 고층건물들 탓이었다.

조금은 익숙하고 조금은 낯선 거리와 지역을 다니면서 찾아본 여러 곳 중에서 강한 인상을 준 곳들이 있다.  옛 조상의 얼이 고스란히 살아있던 전라북도 고창에 있던 ‘고창읍성’과 ‘고인돌유적지’는 수수께끼 같은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 (1453)에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서 전라도민이 유비무한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었다.  작은 도시의 한쪽에 자리한 아담한 이끼 끼인 성벽은 보기에도 따스했다.    

새벽에 근 1,7km나 되는 성곽을 한 바퀴 돌면서 소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푸르게 지킨 세월을 가늠해 봤다.  내가 살아온 세월은 그저 지나가는 바람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성안에서 새벽 운동을 하는 음악소리가 내 상념을 깨웠다.  이곳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며, 세 바퀴 돌면 극락 승천한다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이 사인을 한 바퀴 걷고 내려오면서 보았다. 

이 읍성에서 별로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창고인돌유적지가 있었다.  나지막한 산 아래 넓은 지역에 여기저기 있는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무덤이었다.  동서로 약 2.5km 범위에 447기의 고인돌이 집중 분포되어 있었다.  아직 다 확인되지 않았지만 군내 전역 85개소에 2천여기 이상 분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했다.

세계 최대의 고인돌 조밀지로 평가 받고 있다는 이곳은 고인돌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지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긴 세월을 견뎌온 인간의 흔적 앞에서 숙연해 졌다.  기도 소리보다는 침묵의 소리에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산아래 밭에서 장맛비에 휩쓸려서 휘 청이던 해바라기들이 꼭 내 마음 같았다.

그런데 이런 과거의 유적지와 전혀 다른, 근대의 관광지를 찾아보고 또 한번 탄복을 했다.  목포 조금 북쪽에 있는 일로라는 지역의 ‘회산백련지’에서였다.  동양최대 백련 서식지라던 이곳을 찾았을 때는 장마비가 심하게 내리고 있었다.             

예전에 농경지의 젖줄 역할을 했다는 총 33만 m2 거대한 저수지의 가장자리에 인근 마을 주민이 백련 12주를 구해다가 심었는데 그날 밤 꿈에 하늘에서 학이 12마리가 내려와 앉아 흡사 백련이 피어있는 모습과 같았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열과 성을 다해서 연을 보호하고 번식하며 가꾸어 오늘 같은 관광지로 만들었단다.

거대한 백련지를 한 바퀴 돌고 싶었지만 우산을 들어도 몰아치던 비바람에 푹 젖어서 조금 밖에 걷지 못한 안타까움을 삭였다.  이제 막 피어나던 하얀 꽃들이 비바람에 부딪기며 넓은 잎 사이를 기웃이 던 정경은 대단한 아름다움이었다.  맑은 날, 꽃들이 활짝 핀 정경은 가히 환상적이리라.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옛 것과 새롭게 자리를 틀고 앉은 새 것을 보고 인간이 이 땅 위에 남기는 흔적을 생각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흔적은 아름답게 보전하고 또 후세에 아름답게 물려 주어야 한다.  모국의 긴 역사와 찬란한 문화 유산이 현대판 성공의 뒤안길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변화를 보아서 기뻤다.      

모국은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설레는 가슴으로 찾아가서 아쉬움으로 떠나오는.  한국을 떠난 지 34년 동안 나는 태평양을 수 도 없이 건너가서 늘 새로운 모국의 얼굴을 보고 오는 행복함을 이번에도 어김없이 가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