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맞을 준비로 집안을 치우다가 책상 밑에 떨어진 작은 책을 집었다.  1971년에 친구에게서 선물로 받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였다.   책장의 색갈이 누렇게 변했고 손때가 많이 묻어있지만 그 당시 신선한 내용으로 충격을 준 좋은 책이어서 이사를 많이 다녀도 꼭 챙겨서 간직했다.   

처음 이 책을 선물로 받았을 때의 흥분과, 영어로 책을 읽는 것이 힘들어서 사전을 뒤적이며 고생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청소는 뒤로 미루고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단숨에 읽었다.  이제는 이렇게 쉽게 후딱 읽을 수 있는 것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면서 불쑥 느낀 것은 그 동안 살면서 내가 잃어 버린 순진하게 사물을 보는 능력이었다.  나이와 함께 조금씩 사라진 상상력도 아쉽지만 어른의 계산이 배제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순수함이 그리웠다.  나이를 먹어도 어린아이의 순진함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며칠 전에 한국에 있는 조카의 어린아이들을 위한 선물을 고르면서 어른의 안목에서 교육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선물들을 골랐다.  택배로 한국에 보내고 난 후에야 그 선물들이 진정으로 아이들이 받고 좋아할 선물이었는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슬프게도 오랫동안 내속의 어린아이를 잊고 살았다.

연말이라 머리는 해야 할 많은 일들을 급하게 독촉하지만 마음은 올해 잃은 것과 얻은 것을 정리하느라 어수선했는데 이 한 권의 작은 책자로 오히려 더 무거운 질문을 가지게 되었다.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며,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에게 묻고 싶다.       

그러나 한 해를 보내면서 나에게 중요한 일은 가족 친지들과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해마다 크리스마스 카드에 끼워 교환하는 연말편지는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이정표 같다.  만나고 헤어지고, 원근에 떨어져 살고 있는 지인들과 그 해 개인과 가정에 일어난 기쁘고 슬픈 사건들과 함께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소식까지 근황을 알리며 우리는 사랑을 나눈다. 

이렇게 지인들과 인연의 끈을 이어가는 세월은 꽤 오래 되었다.  이것은 오래 전에 우리가 군대생활을 할 때 이동을 자주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처음에는 남편이 시작했는데 어쩌다 보니 이 연말편지 쓰는 일은 내 몫이 되었다.  요즈음 지인들이 보낸 연말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그들을 다시 반갑게 만나고 그리고 그들의 행복을 함께 느낀다.

어제 일본에서 온 한 친구의 연말 편지 속에는 환하게 웃는 그녀의 불어난 가족사진이 있었다.  동경에서 직장을 다니던 두 딸이 재미있게도 큰딸은 호주사람, 작은딸은 캐나다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했다.  한꺼번에 두 외국인 사위를 본 이 친구는 이제 평생 그렇게 싫어하는 영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투덜거렸지만 마냥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어린 왕자’의 동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을 읽는 것이라 하는데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지인들과 마음을 나누며 살고 있음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함을 새삼 깨우치며 이 책을 준 단발머리 소녀를 생각했다.  어디에선가 살고 있을 그녀가 올 연말에는 나를 기억하고 고마워하는 내 마음을 읽어 주기를 바랬다.  

2009년의 막바지에서 1971년, 순진했던 어린 시절 내 상상력을 부추겨 주었던 동화를 다시 읽은 기쁨과, 그리고 거의 잊어 버렸던 중요한 교훈을 되새긴 흥분을 갖고 노트북을 열었다.  올해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소식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연말편지를 써나가는 내 목소리가 한결 부드럽다.  비록 순수한 상상력은 나를 떠났고 예전에 죽도록 싫어했던 실리를 따지는 재미없는 어른이 되어 있지만, 아직 내 속에 어린아이가 있어서 희망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