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이란 기막힌 축복이야.  햇수가 보태어 질수록 필연이 되는 관계인가 봐.   지연, 학연의 아름다움을 이번에 너를 찾아 간 덴버에서 인상 깊게 보고 왔어.  너만 생각하고 갔다가 나는 네 주변에서 너를 사랑하는 많은 지인들을 함께 가슴에 담고 왔거든.  

네가 사는 갈색 내륙인 콜로라도의 싸늘한 공기에는 상큼함과 맑은 정기가 있었어.  어쩌면 네가 아직도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 환경에서 얻은 것 같아.  가까이 눈 덮인 산을 보면서 나는 남부의 활짝 핀 목련 꽃을 생각했어.  내복까지 꽁꽁 챙겨 입고 온 내가 우스웠지? 

거의 40년이 되어 가는구나.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긴 생머리 팔락이며, 꿈을 꾸었던 우리는 훗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했지.  몇 년 전 헤어진 지 30년이 지나 다시 만났을 때 생각나니?  서로 꽉 껴안고 반가워서 울고 웃었던 그날,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이 유난히 맑았어.  한국에서 맺은 인연을 이렇게 미국에서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축복에 감사했잖아. 

이민 와서 우리가 선택한 삶은 바로 어린 시절 우리가 꾸었던 꿈의 실체였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진실로 의미 있는 삶을 갈구한 욕심.  그러나 지난 생활은 너나 나나 우리 자신과 치른 힘든 경쟁이었던 것 같아.    

예전에 너의 하숙방에서 가졌던 푸근함을 이번에 너의 집에서 다시 느꼈어.  잔잔한 음악에 마음이 편안했고 네가 그린 그림들 앞에서 나는 네 속 마음을 훔쳐 봤지.  네 그림 속의 사슴들을 너의 집 가까운 산 언덕에서 만났을 때, 노천명씨가 쓴 ‘사슴’ 시 구절이 떠오르더라.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데 산을 쳐다 보는” 너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었어.  사실 너의 짙은 외로움에 가슴이 많이 아팠어. 

그러나 살면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던 너는 타인을 배려하고 현재의 삶에 극성스런 사슴이더구나.  나는 네가 현실에 타협해서 성취욕과 자만에 빠져있지 않음이 고마웠어.  늘 긴장하고 하는 일에 빈틈없이 세심한 정성을 쏟는 네가 자랑스러웠고.  너의 하루에 줄기찬 분수처럼 쏟아나던 열정에서 나는 예전의 너를 보았어.  너의 내부에는 인간의 고뇌를 아파하고 자신에 솔직한 아름다운 성품의 여자가 있더라. 

세월은 무섭게도 너의 외부를 다부진 생활인으로 변신시켰어.  너는 열심히 하면 된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고 인생에서 물질보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알고 있었어.  네 직업의 독특한 환경을 너는 정글 속에 사는 기분이라 했어.  그 속에서 싸움닭이 되어 당당하던 너는 분명 성공한 이민자의 모습이야.  삶에 충실한 너에게서 나는 신선한 충동을 받았어. 

그리고 네 주변에서 든든하게 너를 지켜주던 지인들,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알지?  주고 받는 끈끈한 우애가 부러웠어.  왕선배님 집 앞뜰의 둥근 돌멩이들, 집주인 닮아서 하나도 모난 것이 없이 모두 매끈하고 부드러웠어.  사람 사는 것이 그런 것 아닐까?  잘 다듬어진 돌멩이처럼 둥글둥글 순하게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행복을 주는 아름다움이 바로 우리가 닮아야 하는 인생인 것 같아.        

이번 만남에서 우리는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서로의 내면을 들어냈고 삶의 찬가를 불렀어.  우리 존재의 의미를 찾기에 우리는 아직 젊었으니까.  함께 나눈 대화에서 나는 우리가 목숨처럼 소중히 지킨 자신의 긍지와 자존심이 이민생활에서 변질되지 않은 것이 기뻤어.  좋은 사람인 너와 이 세상에서 단단한 인연으로 묶인 것이 든든해서 집으로 돌아오며 마냥 기분 좋았어. 

'정글 속에 사는 싸움닭’ 이라는 너는 사실 관이 향기로운 사슴이야.  고고한 품위를 가진 소중한 친구인 너에게 아일랜드인들의 기도를 네 잎 클로버에 얹어 보내.  “May God give you…For every storm, a rainbow, for every tear, a smile, for every care, a promise, and an answer for each prayer.”  사랑한다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