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에 오래 사니 내 안목은 남부 사람들을 닮아간다.  세상사를 남부의 상황에 견주어서 보고 과거도 남부 사람들의 관점에서 현실로 연결한다.  장차 자기가 갈 곳을 보여주고 싶다는 토박이 친구의 차를 탔다가 오히려 그녀가 품고 있는 한을 듬뿍 느꼈다.

그녀가 막상 나를 데리고 간 곳은 다운타운 근처에 있는 공동묘지였다.  묘지라 조금 망설였지만 이왕 나선 길, 용감하게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이 묘지는 몽고메리 시 소유이고 2백 년이 되는 역사 깊은 곳이다.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진득하게 배였지만 나와는 인연이 없어서 평소에 지나 가면서만 보았다.  낮은 언덕을 구비 돌아서 작은 야생화들이 초연하게 핀 그녀 가족의 묘역에 도착했다.    

윗대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 고모 등 그곳에서 영원한 안식을 취하고 있는 그녀의 가족들 옆에 작은 공간이 있었다.  바로 그녀가 갈 곳이란다.  아무래도 가족들 속에 끼이지 않으면 영혼이 불안할 것이라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외로웠다.  훗날 나는 어디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것인가?

그녀는 이 공동묘지에 묻힌 많은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무엇을 했으며 누구와 결혼했고, 아이들의 이름은 무엇이며 또한 그 아이들이 커서 어느 집안의 누구와 결혼했으며, 누구는 누구와 사촌이며 등등으로 그녀가 부르는 이름 따라 오래 전에 죽은 이들이 여기저기서 귀 기울이는 듯 했다.   한 시절 이곳에서 떵떵거리며 살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 조용히 평안을 나누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통해서 조상들과 이곳에 정착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녀의 조상은 거슬러 올라가서 1620년 메이플라워호 배를 타고 영국에서 신대륙으로 건너온 청교도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 선조가 누구와 결혼했으며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 자손이 훗날 연방정부로부터 무상토지불하를 받아서 정착한 곳이 바로 앨라바마이다.  지금도 그 때 받은 2천 에이커의 땅은 그녀 집안 소유로 있다.    

한 친지의 묘에 그가 남북전쟁 시 남부연방군으로 참전했다는 비석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이곳 남부에 깊은 상흔을 남긴 그 내전과 그녀 가족의 체험을 들었다.  남북전쟁이 노예제를 둘러 싼 남부와 북부의 갈등에서 빚어진 내전이라고 알았던 나의 관념은 이곳 살면서 많이 허물어졌다.

1830년 초 미국의 7대 대통령이던 앤드류 잭슨 재임 시부터 연방정부는 남부의 농장들이 수확한 목화 생산에 50퍼센트의 세금을 물렸다.  그렇게 거두어 들인 돈을 남부를 위해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북부에 도로를 설치하는데 사용하자 남부 사람들이 반발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과된 세금이 북부 공장들에 물린 작은 세금과 큰 차이가 나자 마찰도 커졌다.  미국이 무리한 과세 때문에 영국에서 독립했듯이 남부인들도 연방정부에서 분리하려고 했다.  이 세금 문제가 가장 큰 핵심으로 남북의 갈등이 되었다가 노예제로 불거져서 오히려 남북전쟁은 노예제에 인한 것으로 더 알려졌다. 

내전 중에 링컨 대통령이 1863년에 발효시킨 ‘노예 해방령’ 의 골자도 바로 연방정부로부터 탈퇴하려던 반항적인 남부 10주의 노예만을 해방시키는 선언이었다.  그 당시 북부의 노예들이나 특히 남부 반항하던 주들 중에서도 연방정부에 우호적인 카운티들의 노예들은 이 해방령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전국적인 노예해방은 훗날 개정된 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4년에 걸친 내전으로 초토화가 되었던 남부는 아직도 완전한 회복을 하지 못했다.  그 내전 후로 남부 주들이 북부보다 경제적으로 후진적인 상태가 된 것에 대한 분노는 남부인들의 가슴에 응어리졌다.  이곳 사람들이 북부 양키들에 은근한 반감을 보이는 것을 이민자인 나는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 토박이 친구들을 통해서 조금씩 그 아픔과 깊이를 느끼게 되었다.

150년이 지났으니 이제 그만 내전의 상처가 아물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들이 우리를 침략했어!” 라는 한 맺힌 친구의 대답이다.  바로 일제 36년을 체험한 조상들의 아픔을 그 후손들인 우리가 아직도 느끼는 것과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