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고 화사하게 부르르 떨며 가슴에 담기는 단풍잎들은 마치 요정들 같았다.  아름다움보다 오히려 신비에 가까운 마술로 취기를 느끼게 하는 낙엽들로 화사한 칵스농장에 지난 주말 원근에서 200여명이 넘는 남부인들이 모였다. 

해마다 이맘때쯤 칵스 부부가 자신들의 농장에 친구들을 불러서 통 돼지 바비큐 파티를 여는 행사는 올해로써 21년째이다.  몽고메리에서 남동쪽으로 한 시간 운전거리에 있는 남부 시골인 Smuteye에 있는 칵스 농장을 찾아온 사람들은 요즈음 정치나 문화, 인종의 차이로 줄줄이 분리되는 것과는 아랑곳 없다.  그저 모여서 함께 서로의 존재를 귀하게 즐길 줄 아는 열린 마음을 가진 친구들이다.

농장주인인 흑인 남편과 백인 아내가 오랜 세월 세상풍파를 헤치며 사귀어 온 흑, 백의 친구들이 나이나 지위, 배경을 떠나서 한 마음으로 모인다.  동양계인 우리 부부도 언젠가부터 적당히 이들 속에 섞였다.  낯익은 사람들이나 낯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어떤 주제의 이야기든 편안하게 대화를 할 수 있는 마력의 분위기가 이 농장에 있다.  나는 미약한 바람에 굴러 다니는 낙엽처럼 천천히 움직이면서 올해 새로 보는 사람들을 찾아 다녔다.

올해는 특히 젊은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재미있었던 만남은 93세인 2차 대전 용사와 이제 7주된 아기였다.  2차 대전 시 육군 공수부대원으로 프랑스에서 전쟁을 치렀다는 93세의 흑인 노병은 한국에서 왔다는 나에게 프랑스 예찬론을 폈다.  그는 전시에 프랑스 문화와 사람에 반했다면서 평생 프랑스 음식을 좋아하고 뭐든지 프랑스 것이면 사랑한다고 했다.

노병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바로 그의 뒤로 다가온 몽고메리에 있는 공군부대로 교육을 받으러 온 프랑스 군인 가족을 보았다.  태어난 지 7주 된 아이를 안고 있던 젊은 프랑스 여인과 남편인 공군 소령을 나는 노인에게 소개했다.  모두들 한바탕 인사를 나눈 후에, 노병은 미국시민권을 가진 프랑스 아이를 신기하게 주시하다가 “사랑한다” 고 했다.  그의 동공이 흐린 눈에 아이가 프랑스 아이인지 미국 아이인지 구별이 필요 없음을 느꼈다. 

또한 현재 LA Dodgers야구단에서 활약하는 야구선수는 우리와 함께 참석한 일본대령을 찾아왔다.  그는 일본의 한 야구단에 입단계약을 맺어서 내년 여름에 일본을 간다며 반갑다고 인사했다.  일본대령은 국방부 친구들을 몰고 가서 필히 그의 야구게임을 응원하겠다고 즉석에서 약속하고 서로 연락처를 나누었다. 

이달 초, 선거에 나섰다가 고배를 마신 한 민주당 정치인은 낙엽을 밟으면서 철학자다운 의미심장한 ‘정치무상’의 고백을 했다.  앨라바마에서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밟히는 민주당원 신세가 서러웠던 그에게 올 가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사람들 주변을 한적하게 찾아온 우아한 말들에게 땅콩을 먹이고 낙엽이 수북한 오솔길을 걸어서 전세기의 목조건물을 구경하고 나와서 6백 파운드가 넘는 이 농장의 애완동물, ‘윌버’를 만났다.  해마다 옆에서 밤새 구워져서 사람들에 먹히는 동료 돼지를 목격하면서도 처연해야 하는 것은 그의 비극인 듯했다.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날씨에 어울리는 고운 농장풍경과 그 여유로움에 한껏 부푼 정서를 나누고 풍성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 좋은 남부 사람들, 모두가 이웃이고 지인들이 되었다.  해마다 이들과의 인연을 다지면서 풍만함을 함께 즐기니 내 마음은 더욱 푸근해졌다.  인심 좋은 칵스 부부가 마련하는 이 행사에서 마음의 향기가 고운 낯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진정 행복한 축복이다. 

자연과 사람들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룬 칵스농장에서 93세의 정정한 노병이나 갓 태어난 아기, 군인, 전문 야구선수, 정치가, 건축가, 목사와 의사, 민권운동가와 변호사, 가정주부 등 다양한 직업의 정겨운 남부인들 남녀노소가 모여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참여하는 기쁨은 바로 이곳 남부에 사는 즐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