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파도처럼 밀려오는 변화의 물결을 탄다.  방향감각 없이 거리를 헤매며 어지러우니 떨어지는 낙엽이 그저 아름답지만은 않다.       

30년 이민생활을 툴툴 털고 지난 주 한국으로 되돌아간 LA 친구가 비운 자리가 너무 크다.  은연중에 나는 LA 와 덴버에 사는 옛 친구들에게 많이 기대고 살았나 보다.  이제 든든한 기둥을 하나 잃으니 중심이 기울어서 불안하게 휘청거린다.  허전한 마음에 거리를 덮은 낙엽을 발로 차보지만 낙엽은 부스스 흩어진다.  서울에서 새로운 생활의 기반을 다지는 그 친구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만나고 헤어지고.  새싹으로 돋았다가 낙엽 되어 떨어지는 나뭇잎이 바로 우리의 삶 같다.  남부 토박이 친구들과 달리 ‘한국인의 정’이 끈적한 우정을 40년 가까이 나눈 소중한 친구들.  어릴 적 추억을 함께 가진 옛 친구들은 이민생활에서 서로의 고향이 되어서 외로움을 달래어 주어서 좋았다. 

그런데 이제 더욱 가까이 살며 자주 보아야 할 나이에 한 친구가 더 먼 곳으로 훌쩍 떠나버려서 남부 따뜻한 날씨에도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채운다.  벌써 눈이 온다는 덴버에서 나보다 더 싸늘하고 휑한 바람을 맞고 있는 덴버 친구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동안 우리는 가끔 만나고 불쑥 보고 싶을 때는 서로가 쉽게 전화를 하던 같은 문화권에 있었다.  이민자의 아픔과 기쁨을 서로 다독이며 한국에 사는 친구들과는 다른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  한국과 미국은 많은 시간 차이만 아니라 문화환경이 달라서 별나라같이 더 먼 거리로 느껴진다.        

이민 와서 안 해본 일이 없다며, 지난 30년 미국 생활은 소설로 써도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던 LA친구였다.  이국 땅에서 어렵게 고생한 후 이제 생활의 기반을 잡고 살던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고 했을 때 농담인줄 알았다.  그리고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 혼자서 청, 장년 기를 보낸 미국을 쉽게 떠나지 못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녀는 용감했다.

노후를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생활을 찾아 떠난 그녀의 한국행은 쉽게 내린 결정이 아님을 안다.  예전에 그녀의 부모님이 시작한 삶의 목적을 계속하려는 그녀를 아무도 붙잡지 못했다.  그녀는 모국에서 부모 잃은 어린 생명들을 키우는 복지사업에 뛰어 들었다.  최선을 다하여 따스한 사랑을 나누려는 그녀의 자산은 미국 이민체험기였다.          

LA친구가 떠난 현실에 우울하다가 최근에 배달된 U.S. News & World Report 잡지 앞에 첨부된 안내문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이번 12월호가 프린트로 발간하는 마지막호 라는 통보였다.  이 잡지는 내 미국생활의 가이드였다.  오랫동안 나에게 많은 미국사회의 정보를 주었던 이 잡지가 결국 변하는 세태에 굴복했다.  마지막호를 잡은 내 손이 가늘게 떨렸고 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도 떠났고, 즐겨 읽던 잡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서인지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더욱 을씨년스럽다.  변화된 환경을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는데 거부감으로 꿈틀거리니 앞으로 다가올 추운 계절, 겨울이 두렵다.    

떠난 친구나 절판된 잡지 같은 변화를 잊기 위해서 얼마 전에 운전하며 들은 NPR의 한 주제에 골몰한다.  어쩌면 헤밍웨이가 썼다는 6 단어의 짧은 소설, ‘For sale, baby shoes, never worn’ 에서 받은 깊은 감동 탓인지도 모른다.  군더더기 내용이나 감정은 독자들의 상상력에 맡겨버린, 짧지만 완벽한 이야기.  얼마나 놀랍고 강렬한 스토리인가!  

NPR의 보도 후부터 25 단어 미만의 어휘로 함축된 완벽한 내용의 의미 전달에 호기심이 끌린다.  한국으로 떠난 친구에게 그녀 존재의 의미를, 그녀가 우리의 삶에 던져 준 도전을 25 단어로 표현하려고 하니 인생철학을 논하듯 너무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