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모키 마운틴의 정상으로 향하는 마지막 반 마일 경사길을 오르면서 산소부족으로 두어번 쉬었다.  “우리 이제 늙었구나” 했더니 남편은 “아직 이렇게 오를 수 있잖아” 했다.  정상 전망대에서 둘러보니 동서남북 구비 구비 산등성이가 밝은 색깔을 확 뿌려 놓은 아스라한 풍경화로 변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차를 세우고 오솔길로 들어섰다.  아름답게 물던 단풍을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산이 좋아, 단풍이 좋아 구경하느라 몸과 마음이 모두 즐거웠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가을이면 늘 읊조리던 프랑스 시인 구르몽의 시 구절을 기억하며 낙엽을 밟았다.

화사한 보석처럼 햇살에 파르르 떨던 붉은 잎이 하나 눈 앞에서 떨어져 계곡의 물 흐르는 바위틈에 걸렸다.  흐르는 물에 따라 가라고 손으로 밀어주었다.  하지만 낙엽은 잠시 후 다시 바위틈에 멈추었다.  무엇에 그리 미련이 많은 것일까. 

숲길에서 일부러 소복히 쌓인 낙엽 위로만 발걸음을 옮기며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구르몽은 ‘낙엽은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 고 했다.  그 나지막한 소리가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은밀한 비밀이 되어버린 슬픈 추억이 낙엽을 밟는 소리에 섞여 있었다.  덕수궁 뒷 담길의 낙엽을 밟으며 구르몽의 시를 함께 읊조리던 그때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에서 낙엽을 밟고 있을지 궁금했다. 

‘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긴 세월이 변화 시킨 내 모습이 오솔길에 있었다.  애달프고 또 조금 허무한 기분으로 이끼가 잔뜩 끼인 바위와 고목 둥치를 덮은 낙엽을 보며 그동안 살면서 사랑했던, 낙엽처럼 떠나버린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했다.   오랜 이민생활에 그리움으로 가슴속에 똘똘 뭉쳐 있던 그들이 스모키 마운틴 산 속에 낙엽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다.  보고 싶은 사람들,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은 이제 둔한 아픔이다.  그러다 나무 가지에 버티고서 맘껏 햇살을 흡수하던 황금빛 잎새에 나는 삶의 힘을 느꼈다.  아직 낙엽이 되지 않았음에, 살아 있음에 기뻤다. 

맑은 산 정기를 받으며 계속 산을 올랐다.  여기저기 붉고 노란 나뭇 잎들이 어울려서 보여준 처연함에 눈물이 났다.  쓸쓸한 감정이 파도처럼 몰려와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 가지에 걸려서 단풍들과 함께 흐느적 거렸다.  슬픈 계절인 가을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앞으로 잃을 사랑이 두려웠다.  조심스레 낙엽을 밟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  기도에 보태어서 떠오르는 시 구절을 기억나는 대로 크게 읊었다.  줄줄 외우던 구르몽의 시를 듬성듬성 기억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앞서 걷던 남편이 멈춰서 나를 기다렸다.  “알아 듣지도 못하는 말로 혼자 왠 소란을 피우느냐” 며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그리고 전에는 단풍 중에 가장 예쁜 잎들을 주워서 책갈피에 끼우더니 “왜 이번에는 전혀 줍지 않느냐?”고 물었다.  “무거워서” 라 대답했더니 감성이 둔한 남편은 도무지 이해 못하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낙엽이 그저 낙엽이 아님을 설명하기가 힘들어서 나는 아예 설명하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산을 내려 오던 사람에게 정상이 아직 멀었느냐고 물어 보았다.  신기하게도 만나는 사람마다 앞으로 1마일 정도의 거리라는 비슷한 대답을 했다.  경사진 산길은 한참을 힘들게 올라가도 여전히 1마일이 남았다.  내가 먼저 두 손을 들었다.  남편의 팔을 잡고 다리가 아프니 그만 내려 가자고 했다.  벌써 오후 4시가 되었고 점심을 거른 것을 기억시켰다.           

산을 내려 오는 것은 지나간 세월처럼 빨랐다.  돌뿌리와 나무뿌리를 적당히 피하면서 사방에 흩어진 마른 낙엽의 처절한 그리움을 외면했다.  그러다 비탈길에 쌓인 갓 떨어진 아름다운 낙엽을 밟으며 남편에게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하고 물었다.  남편의 작은 눈이 둥근 달로 변하자 나는 만족했고 내 웃음소리는 바람따라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