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라고 이곳에 사는 일본가족 몇 가족이 모였다. 그 중에 8개월 전에 미국에 온 한 주재원 가족이 있었다. 그 가족의 초등학교 5학년 딸과 3학년 아들의 학교등록을 도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영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던 아이들이 이름을 묻던 학교 선생의 질문에 입은 꼭 다물고 바닥으로 눈을 내리며 당황하던 모습이 어제같은데 이번에 이 아이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많이 놀랐다.   

여자아이가 내 옆에 앉아서 남자친구로부터 받은 귀여운 연애편지 이야기를 살짝 들려주었다. ‘너를 좋아해’라고 쓴 그 편지를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것을 엄마가 모르고 세탁기에 넣고 옷을 씻은 바람에 이제는 읽을수가 없어졌다며 아쉬워했다. 그 이야기를 전하며 수줍게 웃던 아이의 얼굴이 풋사과처럼 상큼했다. “그 남자아이가 누군데?” 하고 물었더니 “한국에서 온지 얼마되지 않은 보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런데 난 그애를 좋아하지 않아요”라던 아이의 부끄러움을 감추려던 표정에 나는 그만 까르륵하고 웃었다.   

살포시 들어나는 덧니가 귀여운 여자아이가 옆에서 계속 조잘거렸다. 자기는 사탕을 주었더니 남자아이는 한국산 껌을 주었다고 했다. 그것을 본 같은 반의 여자친구들이 자기를 놀린다며 색색거렸다. 자기는 남자친구가 없다고 강조하면서도 그 남자아이에게 보낸 편지내용을 살그머니 나에게 털어 놓으며 동정을 구했다. 타국에 살면서 서툰 영어로 순수한 마음을 나누는 편지를 교환한 한국과 일본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귀여워서 나는 계속 미소를 띄우고 이야기를 들으며 내 기억창고를 뒤적였다.

슬프게도 나는 초등학교시절 남학생과 편지를 주고 받은 적이 없다. 중학교나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학교를 다니며 남학생과의 만남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교회를 다니던 친구들은 교회에서 남학생들을 보았지만 나한테는 그런 기회도 없었다. 청소년기에 기껏 정성들여 편지를 쓴 기억은 친한 여자친구들이나 라디오 방송국의 음악프로그램 담당자가 고작이었다.

가슴 설레며 이성과 편지를 주고 받았던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이 일본아이 보다는 한참 늦게 체험한 셈이다. 처음으로 남자친구와 사귀면서 편지를 쓸 적에 아름다운 편지지와 펜의 색깔이나 굵기에도 민감했었다. 그리고 예쁘게 글을 쓰는 연습을 많이 했었다. 서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동서양의 유명한 시구절을 많이 인용하였지만 정성들여 편지를 썼었다. 남자친구가 보낸 편지는 아무도 없는 외진 곳에서 혼자 읽곤 했었다. 그것은 비밀스런 나름의 거창한 행사였는데 지금은 우습게도 편지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데이트 할적에 한강변에 앉아서 풀잎 배를 띄워 보내며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었던 소원은 이루어져서 나는 이렇게 멀리 떠나와 산다. 그런데 예전에 나를 웃고 울린 그 남자친구는 어딘가에 살며 이제 나이 60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어서 “할아버지” 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싶으니 우리들의 변화에 웃음이 키득거렸다. 그때 내 눈앞에서 일본 남자들과 수다판을 벌리던 나이든 남편의 주름진 얼굴이 어른거렸다. 왠지 웃음을 멈출수가 없어서 모인사람들에게 민망하도록 크게 웃었더니 남편이 흘끗 뒤돌아 보곤 멋모르고 싱글벙글했다.     

옆에서 여자아이도 함께 배시시 웃었다. 그녀가 처음 남자아이로부터 받았다는 편지가 내 속에 일으킨 파문을 알기라도 하듯이. 앞으로 많은 세월이 지나면, 이 아이는 지금 글씨가 지워져서 읽을 수 없다고 서운해하는 연애편지를 기억하지도 못할것이다. 또 그 편지를 준 한국보이의 이름도 잊어버릴 것이라 생각하니 삶의 묘미에, 그 아름다운 신비에 취해서 나는 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계속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