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전의 일이다. 걸프만 바닷가, 오렌지 비치의 한 호텔 발코니에 앉아서 뜨거운 햇살을 피하고 있었다. 반짝이며 몰려오던 파도들이 가까이서 멈추었고 모래 언덕에 있던 한 분홍색 의자가 선명하게 눈안에 들어왔다.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나는 주변의 정경에 빠져 들었다. 작은 배가 가까이서 무심하게 지나갔다. 갈매기와 펠리칸 몇이서 서성거릴뿐 그 외로운 의자 주위에는 인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그 의자에 앉아서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심취되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태양열에 가물 거리는 환상을 자세히 보려고 안경을 가지러 방으로 들어갔다가 전화를 받았다. 몽고메리 한인회에서 사무장이 전화를 했다. 그녀가 알려준 충격적인 소식은 완전히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윤수미씨의 장례일정을 통보해 주는 사무장에게 나는 분명 윤수미씨냐고 거듭 물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뉴스에 전신이 마비되는것 같았다.

사무장의 전화를 끊고 그녀를 아는 다른 지인들에게 전화했다. 무엇인가 오류가 있으려니 했는데 오히려 확인이 되어서 더욱 기운이 빠졌다. 수미씨가 최근에 많이 아팠다는 것과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 만난 것는 2개월 전이다. 그때 그녀가 아픈 사실을 감추고 씩씩한 모습을 보여준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무겁게 내려 앉았다.

발코니의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아서 나는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그 외로운 의자에 앉은 사람이 윤수미씨 인것을 알았다. 안경이 없어도 그녀의 모습은 선명히 보였다. 따가운 햇볕도 아랑곳없이 얼굴은 하늘을 향한채 파도소리에 흡수되던 그녀의 모습을 보려고 나는 축축한 눈을 자꾸 닦았다. 

그녀는 이제 나이 40인 젊음이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5년 전이었다. 미술관에서 가졌던 어떤 모임에서 한 한인여자를 보고 반가워서 인사를 했는데 내 이름을 들은 그녀가 깜짝 놀랐다. 그녀의 언니가 이곳 미씨사이트에서 내 글을 읽고 있다면서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부끄러웠고 또 반가웠다. 나는 몽고메리에 있는 현대자동차 회사에 다니는 그녀의 당당함이 좋았다.

그후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는 편안하게 우정을 키웠다. 윤수미씨는 이민 1.5세였다. ‘현대자동차 체질’로 일중독자였지만 지역사회 환경에 관심이 많은 것이 나와의 공통점 이었다. 나는 직장 일에 몰리면서도 아이들 교육에 소홀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녀의 모습이 안스러웠다. 딸 둘을 키우며 직장 일을 남보다 더 잘하려고 열성적이던 그녀를 보면서 딸 둘을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허덕였던 나의 과거가 회상되기도 했었다.

수미씨가 딸들이 가진 특성을 이야기 할적에는 목소리가 몇 옥타브 올라가서 은연중에 그 아이들을 눈앞에 보는듯 했었다. 그녀는 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엄마였지만 동시에 현대자동차의 재정팀장 및 부장으로 일이 많아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정신없이 바빴다. 언젠가 그녀가 이곳 미씨의 내 글에 “미국시민 이지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사람으로 꿋꿋이 산다.”라던 댓글을 남겼다. 그녀는 그렇게 꿋꿋이 살았다. 

나는 젊고 능력있는 그녀가 앞으로 앨라바마와 한인사회를 위해서 많은 활동을 할것을 믿었다. 2년 전에 그녀가 Leadership Montgomery 라는 9개월 과정의 지역사회 지도자 배출 코스에 선정된것은 당연했다. 놀라웠던 사실은 이틀 동안 열린 그 코스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나와 친분이 있는 지인과 수미씨가 같은 호텔방을 사용한 것이었다. 세상은 좁았고 덕분에 우리의 네트웍은 확대되어 갔다. 그후 지인과 만나면 큰언니쯤 되는 우쭐한 기분으로 같은 한인인 수미씨를 자랑스럽게 이야기 했었다.

수미씨가 작년 크리스마스 카드에 끼워서 보낸 사진과 가족의 근황을 생각하니 그녀의 죽음은 잔인한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사랑하던 남편과 어린 딸들을 두고 마음 편하게 세상을 떠나지 못했을 그녀가 딱하고 슬펐다. 수미씨에 얽힌 많은 상념에 젖어서 마음이 혼란해졌고 바다도 나에게 평화를 주지 않았다.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저녁에 있는 그녀의 입관예배에 참석하려고 몽고메리로 돌아오는 65번 도로는 세상에서 가장 흔들리던 길이었다. 한참 활약할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삶이 억울했다. 초등하고 4학년과 2학년인 눈망울이 초롱한 아이들의 얼굴이 자꾸만 어른거렸다. 이제는 고통을 받지 않을 수미씨의 평안한 안식을 빌고 또한 그녀의 남편과 어린 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위한 기도를 계속했다.       

이제 나는 다시 바닷가 벤취에 앉아 있다. 이른 아침의 햇살이 반짝이는 수 많은 별들을 바다에 뿌려 놓았다. 그 별처럼 아름다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니 윤수미씨도 있다. 열심히 살며 가족과 직장을 사랑했던 윤수미씨.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도 벌써 3주가 되었다. 진심으로 사랑한 윤수미씨를 잃은 아픔은 응어리가 되어서 아직도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러나 가슴을 환하게 열어주는 바닷가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녀는 사람살이에서 챙겨야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