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의 사연, 개개인의 이야기는 늘 나를 매료시킨다. 한 인간이 살아온 이야기는 세상의 어떤 소설보다 더 진한 감동을 담고 있다. 그것은 부와 지위와는 상관없다. 그래서 나에게는 새로 만난 사람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그 사람의 어제를 엿보려고 애쓰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글로 쓴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그런 노력이 필요없다.

지난 주 버밍햄에서 반가운 지인을 만났다. 여름에 한국을 다녀온 그녀는 친정어머니의 팔순과 결혼 60주년을 기념해서 그동안 어머니가 쓴 시와 글을 모아서 ‘엄마의 일기’ 라는 책을 출판했다. 사과는 나무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다. 시와 수필을 쓰는 그녀의 중심에는 역시 시와 주옥 같은 글을 쓰는 어머니가 있었다. 그날 저녁 호텔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나는 ‘엄마의 일기’를 읽었다.

어머니의 일기는 소박하고 아름답게 사는 조선 여인의 생의 찬가였다. 동시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세상살이를 유교정신과 가톨릭의 박애정신으로 잘 벼텨낸 장손 맏며느리 삶의 증언이었다. 어머니는 일제시대의 애화나 사선을 넘나던 한국전의 실체를 차분하게 더러는 벅차게 기술했다. 험악한 시세의 피해자였던 가족과 이웃, 또한 수 많은 고향사람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은 어머니의 가슴에 멍에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언제나 계절의 변화에 민감했고 또한 소소한 일상 생활에서 기쁨을 찾았다.

“씨를 뿌리면 반드시 난다. 이것이 삶의 진리이다” 라며 흙의 철학을 사신 어머니의 삶은 구수했다. 텃밭과 꽃밭 사랑이나 집안을 들락이던 벌레나 해마다 찾아오는 제비들과 나눈 애틋한 정, 또한 혼자서 아름다운 산야를 찾아 다니면서 자연의 멋을 즐겼다. 어릴적 기숙사에서 자신의 조청을 몰래 먹은 친구를 60년만에 만났을 적에 욕부터 했다는 구절에서는 웃음이 나왔다. 상처가 컷던 탓에 세월이 약이 되지 않았던 인간다움 이었다. 그리고 장남을 가슴에 묻고 오열하던 어머니의 아픔이 나중에는 순교정신으로 변하고 또 승화되어 “나 자신이 신비다”로 감사하는 숭고한 자세에 고개가 숙여졌다. 사랑과 믿음 그리고 소망의 기도를 어머니는 실천하고 계셨다.   

잔잔한 감동을 준 한 어머니의 일기를 읽고 나서 나는 고등학교 시절 단짝 친구의 아버지가 쓴 시를 생각했다. 친구가 그녀 아버지의 책을 한아름 안겨준 것은 20여년 전이다. 그녀 아버지는 건국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직을 역임한 목사님이셨다. 그는 정년퇴직 후 간간이 쓴 시를 모아 시집으로 묶으면서 한 책의 서두에 이렇게 썼다. “나는 시를 더러 읽었지만 발레리 같은 난해의 시보다 롱 펠로우나 프로스트처럼 쉽고도 감동을 주는 시를 좋아한다. 나는 원래 시를 만들 생각이 없었지만 요즘 하도 무료하여 몇편 써 보았다. 읽거나 말거나.” 라고. 제일 마지막 글, ‘읽거나 말거나’에 폭소하며 그의 시를 읽었었다. 한 세상을 휘젖고 살며 얻은 지혜가 그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처럼 쉬운 단어에 녹아 있었다.

아버지의 책들을 전해주던 친구의 표정은 오랫동안 나의 부러움이었다. 간혹 멀리 사는 그 친구가 그리우면 나는 그녀 아버지의 글을 읽는다. 그의 글에는 철학적인 논리와 재미있는 동서 고금의 교훈도 많지만 사회 전반의 어긋난 세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우려가 솔직하게 기술되어 있다. 나는 애국적인 그의 글을 읽으면서 역시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나의 아버지의 음성을 듣곤 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겨울을 보내는 노년의 외로움이 강하게 배여서 애달펐다. 이제 나도 가을의 계절을 사니 노년의 슬기로움과 평안을 아르켜주는 그의 시에 사용된 언어 하나 하나에 쉽게 매달린다.

아버지의 책을 안겨준 옛 친구는 요즈음 그녀의 아버지를 닮은 생활을 하고 있다. 그리고 소중한 어머니의 일기를 타인들과 나누는 버밍햄의 지인 역시 그녀의 어머니를 닮아가고 있다. 생활의 맛을 안 그들의 부모는 세상 풍파를 견뎌내며 걸른 감정들을 차곡차곡 글로 정리했다. 글속에 담긴, 부모들이 최선을 다해 생활하면서 잡았던 의식의 끈들이 신기하게도 우리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