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라바마 중부의 도시 버밍햄의 미술관은 몽고메리 미술관보다
전시관이 넓고 소장품이 많다. 가끔 특별 전시회를 보면서
상주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았더니 이제는 정겨워 찾게된다. 매번 느끼지만 이번에도 전시품들을 보면서 역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를 예찬하였다. 그러다가
3층에 있는 미국 원주민들의 토속품 옆에서 찬바람을 맞았다.
캐나다 원주민인 이누이트족의 특별 조각전이었다. 북극지방의 석재인 동석 조각 공예품들로 대부분 동물과 모자상이었다.
새나 짐승들도 사람과 같이 영혼이 있다고 믿었던 이누이트족이다. 자연히 그들이 다듬은
돌의 형상에도 혼이 스며들어 있었다. 인간과 산림순록이 하나로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지만 하늘을 향한 얼굴에는
태양을 향한 그리움이 있었다. 하얗게 세상을 덮은 눈위에서 평생을 사는 사람들, 모두 얼어 붙은 환경에 몸을 기댄 사람의 생존방식은 단순했다. 사냥과 낚시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고 살았다.
약한 추위에도 몸살을 앓는 나에게 극북 지방에 살았던
겨울사람들의 이야기는 으스스 한기를 주었다. 그런데 전시된 작품들을
자세히 보니 북극해 추운 지역에 살았던 그들의 생활에 웬지 슬픔보다는 기쁨이 더 많았을것 같다. 비록 그들의
삶이 고행자같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평안과 따스함을 즐겼다. 문명 사회의 냉정한 ‘나와 너’가 아닌 ‘우리’로써 서로 도우면서 순하게 살았다. 그들이 살며 가졌던 야망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했다.
‘Please Touch!’ 라는
사인을 가진 조각품이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고 앉아있는 형상의 부드러운 어깨를 만져
보았다. 싸늘함이 단단하게 얼려있는 선을 통해서 북극인들의 강인함을 느꼈다. 하늘과 땅, 바람에 맡긴 운명에 순응하다가 백인 사회로 옮겨 살아야했던 이누이트 여성의 작품에는
고독과 혼란을 버티는 슬픔이 있었다. 그녀는 변화의 고통에 눈을 가리고 대항했다. 서구 문명의 영향으로 천연의 순진함을 잃은 이누이트족의 현실을 피해 다른 전시장으로 떠나는 내 등으로 서늘한 북극의 바람이 따라왔다.
미술관 곳곳을 한바퀴 돌고나서 사진같은 초상화 앞에
앉았다. 정교한 그림속에서 르네상스 전성기의 고운 자태를 한껏 뽑내고 있는
여인은 나이를 추측하기 힘들었다. 실제 인물과 대화하듯, 그림속의 여자와
인사했다. 유난히 밝은 눈빛에 심술궂은 장난기가 그렁그렁했다. 주 중이라
한적한 미술관을 혼자 어슬렁거리다 다시 그녀의 초상화를 찾은 나에게 마치 무엇이 궁금한지 묻는듯 했다.
건너 방에 전시되어 있는 토기들을 사용한 사람을 아느냐고
물었다. 질감이 투박한 그릇에 전날 한식당에서 먹었던 뜨거운 갈비탕을 담아
보았더니 향토색으로 정감이 좋았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뛰어 사람의 체온을 느끼게 해주던 토기를 보면서 수
백년 전에 그 그릇을 만들어 사용한 사람은 무엇을 담아 먹었는지 궁금했었다.
다시 바람둥이였던 일본 천황의 아들 겐지를 아느냐고
물었다. 3층 일본관에 겐지왕자의 멋들어진 애정행각을 종이에 잉크와 색깔,
그리고 금으로 얄삭하게 옮겨놓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11세기에 쓰여진 최초의
산문 소설이었던 ‘겐지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재미있다.
그런데 겐지왕자의 엉뚱함이 유럽 르네상스 시절의 방탕한 귀족과 닮은 점이 많았다.
하지만 꼭 만나 보아야 할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일본과 중국 전시관 사이즈 반쯤의 작은 구석방에 자리잡은 한국관을 방문하라고
권했다. 전 세기에 누군가 만든 퀼트 보자기가 눈 안에 들어오지만 방문자의 발길을 잡는 것은 중앙에 따로 전시된 담백하고 솔직한 매력을 가진 커다란 백자이다.
그 백자를 빚어낸 이조시대의 도공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초월한 신선한 삶의 자세를
백자에 담은 그를 만나면 진정한 인생 철학을 배운다고 일러주었다. 물론 내가 그의 동족이라는 자랑스런 사실을
보탰다.
미술관에 자리잡은 동서양 삶의 흔적들은 이구동성으로
영원을 외친다. 그리고 오랜 세월 잘 익은 포도주의 향긋함으로 방문자의 정신을 취하게
한다. 그림속에 옮겨 앉아서 피부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영원히 살아있는 중세기의 여자와 작별을 하고 미술관을
나서니 공기속에는 벌써 봄의 기운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