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35년쯤 전인가, 한창 꿈을 꾸며 꿈을 먹고 자라던 시절이 있었다.  언젠가 한 친구와  훗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하며 우리의 미래를 궁금해 했었다.  교정이 좁다고 누비며 긴 생머리 팔락이던, 장미빛 미래를 꿈꾸던 철부지들이었다. 

지난 주말, 그 친구가 애틀란타로 찾아 왔다.  아름다운 유럽풍 주택의 테라스에 마주 앉아서 그녀가 불쑥 말했다.  예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했는데 이렇게 만났구나하고.  나이따라 머리는 짧아졌지만 우리들 마음은 여전히 어렸다.  남부의 따가운 햇살을 힘겨워하며 그녀의 눈이 젖었다. 

중년의 우리는 단절된 많은 세월을 빠르게 메꾸어 갔다.  미국 시민권자가 된 나와 뉴질랜드 시민권자가 된 그녀.  우리는 지구 반대 방향의 나라들에 국적이 바뀌어 있었다.  미군이었던 나와 심방 전도사로 변한 그녀.  철부지 시절의 꿈은 전혀 아니었던 차가운 현실이다. 

아들 둘 키운 그녀와 딸 둘  키운 나.  만난 적이 없는 그녀의 남편과 아이들을 상상하며 도무지 우리가 아이 낳고 키웠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하지만 그녀 얼굴에서 그녀를 닮은 두 청년을 찾고 나를 닮은 내 두 딸의 소식을 전했다.

기막힌 기억력을 가졌고 또 아직도 한국에 다리 하나를 걸치고 있는 그녀덕에 우리는 쉽게 예전과 오늘을 들락였다.  옛친구들, 벌써 하느님곁으로 떠난 사람들까지, 그녀는 많은 지인들의 동향을 알고 있었다.  불쑥 한국을 찾아 그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옛 친구들이 그립도록 내가 한국을 떠나 지낸 세월이 너무 길었다.   

작은 나라, 그나마 반쪽이 잘린 남한에서 태어난 우리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기를 거부한 극성스런 여자들이었던가 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하던 예전처럼 우리는 여전히 꿈을 꾸고 있고 이제는 우리 아이들이 어디서 무엇이 될까 궁금해 한다. 

그녀를 통해서 새로운 친구를 만났다.  북쪽에 살다가 남부로 이사와보니 너무 좋다는 집주인 부부.  낯선 여자에게 집과 가슴을 활짝 열어준 아름다운 부부다.  비슷한 나이의 우리는 오래 사귄 친구들 처럼 함께 놀다가 노래방도 갔다.  영원한 사랑과 희미한 사랑을 아쉬워하는 노래가 벽을 치던 노래방에서 나는 열심히 그들이 나누어준 사랑을 가슴에 담았다. 

자정이 지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새로운 목소리로 옛 영혼을 부르는 장사익씨의 노래를 들으면서 우리는 찔레꽃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동안 찔레꽃처럼 울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고 그리고 살아왔다.  그리고 옛친구와 새벽 3시까지 주절주절 나눈 얘기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끈끈한 정을 나눈 따스함으로 잠을 잤다. 

중년의 세 여자가 마주 앉아 편안하게 수다하도록 분위기를 배려해준 집주인 남편은 우리들의 운전사였고 은은한 커피와 근사한 아침을 준비해준 요리사였다.  그는 만사에 참견하는 내 남편과 달리, 앉을 자리와 설 자리를 아는 멋쟁이었다.       

지난달에도 32년만에 찾은 옛친구 만나려고 메릴랜드에 간 적이 있다.  친구의 가족과 내 가족이 처음 만났을때 우리는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세월이 변화시킨 환경속에서도 우리는 철부지 시절의 우정과 아름다웠던 추억을 새롭게 찾아 기뻤다. 

이렇게 가끔 오랜 세월후에 만나는 옛친구들은 차라리 신선한 바람이다.  그들은 내가 어디서 왔으며 또 누구인가를 확인시켜 준다.  나이들면 친구를 찾는다더니 아무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옛친구, 새친구 모두와 함께 새로운 인연의 끄나풀을 잡은 주말, 한인들의 끈끈한 정을 맛보고 혼자 돌아 오는 길은 너무 멀었다.  이들과 가까이 살며 자주 만날수 있다면…욕심이 지나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