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때문에 미시시피에 출장을 갔다. 저녁에 동료와 호텔을 빠져나와 근처에 있던 스타벅스에 들렀다가 눈과 손으로 열심히 대화하는 두사람에 주춤했다. 주위에는 아랑곳없이, 흥분한 그들의 밝은 표정을 훔쳐보며 무슨 대화길래 그렇게 재미있을까 우리는 부러워했다.
불쑥 헬렌 켈러가 생각났다. 딸들과 함께 작년 6월에 방문했던 그녀의 생가를 떠올리고 곁에 없는 두 딸을 그리워하며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헬렌 켈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푸르름이 싱싱한 6월에 태어나서 장애자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의식을 바꾸어 놓고 다시 6월에 세상을 떠난 아름다운 여자. 자신의 시청각 장애를 극복하고 눈 뜨고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마음의 눈을 뜨게 해준 용감한 여자.
그녀의 생가는 몽고메리에서 220 마일 거리인 앨라바마의 북서쪽 끝에 있는 트스컴비아라는 작은 도시에 있다. 그곳에서 해마다 6월말에 “헬렌 켈러 축제” 가 일주일 열리는데 작년에 우리는 그 축제를 보러 갔었다.
다운타운의 공원에서 열리던 축제도 볼만했지만, 정작 우리를 끌어 당긴것은 ‘아이비 그린’이라 불리는 그녀의 생가였다. 입구 왼편의 조금 떨어진곳에 그녀의 청동 두상이 있었고, 150년이 넘은 웅장한 마그놀리아와 떡갈나무뒤로 아담한 하얀 집이 있었다. 역사적인 건물로 등록된 이 집은 앨라바마의 자랑이며 이 지역사람들의 긍지이다.
반갑게 맞아준 할머니 안내자들이 대단한 자부심과 열의로 잘 보전되어 있는 그녀 가족이 사용하던 가구들과 사진들을 설명해 주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 헬렌의 침대가 있던 방문앞에서 우리는 잠시 주춤했다. 그리고 앞문과 뒷문을 연결하는 복도의 양옆으로 있던 4개의 방에서 가까이 닥아온 헬렌의 손길을 더듬었다.
집안 곳곳에 전시된 많은 사진들, 한국어로 번역된 책자들을 포함한 그녀의 저서들과 편지등 88년 동안 그녀가 땅위에서 일으킨 기적의 흔적들은 애잔한 감동이었다. 매년 전 세계에서 5만명이 넘는 방문객들이 그녀의 숨결을 찾아 온단다.
뒷문으로 나가니 오른편에 그 유명한 펌프가 있었고 그리고 작은 건물이 있었다. 설리반 선생이 헬렌과 둘이서 2주일을 보내며 그녀의 고약한 버릇을 고친 바로 그 독채였는데 생각보다 아주 집 가까이 있었다. 나즈막한 천정의 작은 공간에서 헬렌과 설리반 선생이 마주 잡은 인연이 집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 넝쿨처럼 단단하게 얽힌 곳 앞에서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느꼈다.
그들이 밟았던 땅을 밟으며 정신적으로 고무된 우리는 집 주위를 서성이다 근처에 마련된 성지를 보았다. 전 세계에서 그녀에게 보내온 감사의 표적들이 전시된 곳에 한국에서 보낸 청자기도 있었다. 세상사람들의 가슴을 움직인 한 인간의 승리를, 그 실체를 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그녀의 생가 뒤편에서 45년째 공연하던 “The Miracle Worker” 연극을 봤다. 해마다 6월중순부터 한달 정도, 금요일과 토요일 저녁에 공연하는 이 드라마는 앨라바마주의 공식 야외 드라마로 그동안 대단한 명성을 쌓았다. 실제 시설과 비슷하게 장식된 무대에서 120년 전에 이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지역 재주꾼들이 열연했다.
각지에서 찾아온 관광개들로 꽉 찬 객석에 딸들과 함께 끼여 앉아서 별빛아래 날라 다니던 벌레에도 아랑곳없이 숨 죽이고 극속에 몰두했었다. 헬렌이 침묵의 세계를 벗어나 설리반 선생과 대화의 문을 연 계기가 된 펌프에서의 장면은 깊은 감동이었다.
우리는 아이비 그린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두 위대한 여자의 고투와 승리를 체험하고 그들에게 감사를 보냈다. 위대한 인간승리로 역사를 기록한 헬렌 켈러의 유해는 끝까지 그녀와 동행한 앤 설리반 선생과 비서 폴리 톰슨의 유해와 함께 워싱톤 디시의 대성당에 묻혀 있다.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 여동생은 몽고메리에 있는 옥우드 공동묘지에 안식하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과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던 딸들과의 여행은 이렇게 혼자서도 가끔 즐겁게 되살리는 행복한 추억이다. 옆 테이블에서 지치질 않고 여전히 눈과 손으로 빠르게 대화하는 두사람의 밝은 분위기를 엿보며 내 딸들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생생하고 행복한 대화를 나누기를 바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