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인지 환상인지 나는 아직도 아름다운 편지를 손으로 쓰고 싶다.  그리고 영어든 한글이든 글씨가 울퉁불퉁해도 직접 정성들여 손으로 쓴 편지를 받으면 기분이 좋다.

옛버릇은 고치기가 힘든다는 충고는 사실이다.  어릴때 아름다운 노트장이나 편지지를 보면 그냥 지나가지를 못했다.  음식의 맛보다는 눈으로 맛있게 먹도록 장식하는 일본인들의 버릇처럼, 예쁜 편지지위에 쓰는 글은 더욱 돗 보인다고 믿었다.

그동안 잽싸게 배달되는 이메일에 푹 젖어서 손으로 쓴 편지의 기쁨을 앗아간 컴퓨터에 철저히 물 들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카드나 편지지를 보면 여전히 욕심을 낸다.  커다란 플라스틱 컨테이너에 가득 찬 편지지나 카드를 볼 때마다 꼭 밀린 숙제를 보듯이 미안하다.  여유갖고 생각하며 편지 쓰던 버릇을 오래전에 잃어 버렸으니까.

이곳 남부의 예의바른 습관중에 감사를 전하는 버릇이 있다.  무슨 일이든 나중에 꼭 감사의 뜻을 표하는 카드를 주고 받는다.  내가 모은 예쁜 카드들도 그렇게 가끔 이곳 토박이들에게 보낸다.  받는 사람의 성격에 어울리는 그림의 카드를 골르고 적절한 감사 어귀에 따스한 사랑도 함께 담아 보낸다. 

좋은 사람들에게 안부 인사를 해야겠다고 벼르지만 내 주소록에 보관된 집 주소보다는 더 많은 이메일 주소에 아찔한다.  그리고 옛 친구들과 한글로 쓴 편지를 교환한 것이 언제였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영어도 물론이지만 한글을 쓴 필적을 보면 글 쓴 사람의 성격을 대충 파악한다고 했는데 요즈음 내 한글 필적이 기절할 정도로 엉망이다.  이민온 후 30년 사용하지 않던 한글은 다시 찾았지만 바로 키보드 두드리는데 익숙해졌다.  뻣뻣한 손으로 느릿하게 쓰는데 걸리는 시간도 답답했고, 잘못된 표현법 깔끔하게 고치기 힘들어서 짜증났다.  “빨리 빨리” 버릇이 내 속에도 있었다. 

그런데 미시시피 친정식구들의 한글 필적는 이민온지 수 십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깜찍할 정도로 아름답다.  친정엄마가 선두로 오래전부터 성경 쓰기를 하셨다.  대학노트에 깨알같은 글씨로 성경을 쓰시느라 손과 팔, 어깨가 아프다고 하시지만 그래도 매일 몇 시간씩 열심히 책상에 앉으신다. 

친정엄마가 성경을 한번 다 쓰시고 두번째로 다시 쓰실때, 함께 사는 올케와 근처에 사는 여동생도 성경 쓰기를 시작했다.  미시시피 가면 퇴근후 피곤해도 야밤에 성경 쓰기에 몰두하는 여동생과 올케의 끈질긴 노력에 감탄했었다. 

그런데 지난 주 미시시피에서 보낼때 친정엄마의 은근한 압력을 매일 받았다.  평소에 다른 책 읽지말고 성경 많이 읽으라고 늘 훈계하시더니 이번에는 성경을 쓰면서 읽으면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됨을 줄곳 강조하셨다.  솔직히 친정엄마는 여동생과 올케가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성경을 쓰는 것이 너무 자랑스러우신거다.  그리고 기도 제목이 많은 생활에서 좋은 말씀을 배워야 하는데 아직도 철부지인 내가 불안하신거였다.

컴퓨터로 성경을 쓰면 빠르겠지만 직접 노트장에 손으로 쓰는 한글의 유혹에 빠진 올케가 쓴 노트와 친정엄마가 쓰신 노트장을 신기하게 본 적이 있었다.  일률적인 크기의 야무지고 아름다운 한글 필적이 부러워서 나도 빈 종이에 한글로 한 줄을 써 봤다.  내 글자의 크기는 무안하게도 제멋대로 였고 엉성하게 질서가 없었다.    

구태여 예전처럼 손으로 쓰는 글씨에 왜 애착심이 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난 날의 추억에 대한 그리움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편지지나 카드에 어울리는 아름다운 마음을 담을 수 있는 반듯한 글을 쓰기 위해서 며칠째 무딘 손가락을 폈다 다물었다 한다.  나도 성경을 쓰기 시작하면 친정엄마가 제일 기뻐하실텐데…선뜻 덤벼지지 않고 주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