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난 4일 동안 볼티모어에서 완벽한 여행자였다.  워싱톤 디시에서 와서 합세한 딸과 함께 아침마다 가고 싶은 곳, 보고 싶은 곳들 다 보려는 욕심으로 지도 여러 곳에 표시를 했다.  호기심이 많은 딸은 나와 쉽게 의기투합 했다.  우리는 지도를 손에 들고 낯선 거리를 익숙하게 휘젖고 다니며 즐기느라 다리가 아픈 줄도 몰랐다.

조용한 남부의 작은 도시에 익숙한 나는 가끔 이렇게 대도시에 오면 도시 감각이 너무 좋아서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난다.  전 세기의 특색있는 조각품 같은 건물들이나 높은 첨탑의 고풍 교회들이 품고 있는 사연들을 엿보는 것은 얼마나 근사한가. 

우리는 눈길 끄는 특이한 가게마다 들어가서 기웃이고, 미국에서 최초의 가톨릭 성당이라는 대성당을 찾아서 정오 미사도 참석했다.  박물관 같았던 골동품 거리의 한 서점에서는 페이지가 부셔질까바 내 손을 주머니 깊숙히 감추었다.  여자 둘이서 손잡고 다니며 즐거워하니 우리를 동성연애자로 보고 곱지않은 눈총을 주는 남자도 있었다.  그 남자의 핀잔스런 눈길을 뒤로하고 걸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폭소를 터뜨렸는지 아마 그 남자는 모를것이다.  

도시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걷다가 LA에 사는 옛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추석인데 송편을 먹었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오히려 에드가 알란 포우의 작품중에 기억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어릴적부터 유독히도 기억력이 뛰어났던 그녀는 곧 바로 ‘애너벨 리’ 를 읊기 시작했다.  그 시를 쓴 사람을 찾아가서 네 이야기를 해줄께 하면서 나는 그 한편의 시가 얼마나 많은 젊은 여자들의 가슴을 울렸을까를 생각해 봤다. 

조금 비현실적 이지만 깊고 순수한 사랑을 노래한 ‘애너벨 리’를 읽으면도 나도 어릴적에 꼭 안개비 속을 걷는 듯한 공감을 받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볼티모어에서 그 사랑의 노래를 쓴 시인곁으로 가서 그가 존재한 흔적을 만났다. 

애너벨 리---

오래고 또 오랜 옛날

바닷가 어느 왕국에

여러분이 아실지도 모를 한 소녀

애너벨 리가 살고 있었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사랑하니

그 밖에는 아무 딴 생각이 없었다.

나는 아이였고 그녀도 아이였으나,

바닷가 이 왕국 안에서

우리는 사랑 중 사랑으로 사랑했으나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날개 돋친 하늘의 천사조차도

샘낼 만큼 그렇게 사랑하였다.

분명 그것으로 해서 오랜 옛날

바닷가 이 왕국에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고

내 아름다운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하여

그녀의 훌륭한 친척들이 몰려와

내게서 그녀를 데려가 버렸고

바닷가 이 왕국 안에 자리한

무덤 속에 가두고 말았다.

우리의 절반도 행복을 못 가진 천사들이

하늘에서 우리를 샘낸 것이었다.

아무렴! - 그것이 이유였었다.

(바닷가 이 왕국에선 모두가 아시다시피)

밤 사이에 바람이 구름으로 불어와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죽인 것은.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훨씬 강했다.

우리보다 나이 든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로해서 하늘의 천사들도

바다 밑에 웅크린 악마들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내 영혼을 갈라 놓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달빛이 비칠 때면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꿈을 꾸게 되고

별빛이 떠오를 때 나는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눈동자를 느낀다.

하여, 나는 밤새도록 내 사랑, 내 사랑

내 생명 내 신부 곁에 눕노니

거기 바닷가 무덤 안에

물결 치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 곁에.

복잡한 도로 옆에 폐허 같은 오래된 교회 한 귀퉁이에 그는 쉬고 있었다.  그의 묘비명 앞에는 검은 플라스틱 까마귀와 시들은 꽃 몇송이가 비실대고 있었다.  생전에 예민하고 성격이 특이했던 작가가 부산스런 도시의 소음에 얼마나 머리가 아플까 싶었다.  하지만 그가 이 세상을 떠난지가 160여년이 되었다는 시간적인 사실과, 이 도시와 작가의 깊은 인연에도 불구하고 웬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는 진리가 휘청대는 기분이 들었다.  아마 빠른 속도로 옆에서 지나간 자동차 소리 때문이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