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부심보 부부이야기 후편)

마침내 우리 집 TV들이 휴가를 갔다.  오늘은 역사적인 대통령 선거일이라 누가 당선될까 하는 추측과 개표 상황에 대한 많은 속보가 쏟아져 나올 텐데 남편은 아예 TV를 켤 생각을 안 했다.  그는 무거운 나무 둥치같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평소에 TV를 별로 보지 않는 나한테는 반가운 고요함 이었지만 TV 앞에서 깨어있는 버릇을 가진 남편에게는 TV를 켜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날이었다.  여태껏 살면서 이런 우스꽝스런 선거일을 보낸 적은 전혀 없었다. 

각자가 미는 당이 달라서 오랫동안 다투어 오며 많이 지쳐버린 우리 부부는 얼마 전에 색다른 내기를 했다.  자기가 미는 후보가 지면, 상대방에게 천 불을 주자고 남편이 제안을 한 것이다.  나한테 돈을 주고 싶으면 그저 얌전히 주지 무슨 내기냐는 나에게 남편은 설마 하는 고집으로 밀었다.  하지만 남편의 도전을 받아 들이면서 나는 추호도 내가 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미국 사회의 여러 상황이 변화를 위한 변화를 찾는 대세여서 나는 공짜로 생기는 천 불로 무엇을 할까 궁리하며 남편 약 올리는데 몰두했다. 

여러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후보가 훨씬 많은 포인트로 앞장서자 남편은 조금씩 짜증을 내었다.  그리고 공화당 후보의 자세처럼,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고집을 지켰다.  지난 주말에 어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불쑥 남편이 어떤 나라에 가서 살고 싶으냐는 생 뚱한 질문을 했다.  그가 한국, 일본, 멕시코, 캐나다 등 줄줄이 나라 이름을 열거하는 것을 나는 “미국” 하고 짤라 버렸다.  그는 언론의 편파적인 보도로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면서 궁시렁 궁시렁 불만을 쏟아 내었다.  그것은 남편도 조금씩 대세를 인지하고 있음을 말한다.        

오늘은 아침부터 투표했느냐고 전화로 나를 몰아 부치던 남편이 퇴근해 와서는 아예 선거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침묵을 고수하던 그는 바로 방으로 들어가 책을 들었다.  평소의 그와 전혀 다른 행동이었다.  남편 혈압 올리기를 중단한 나도 개와 고양이와 응접실에서 조용 조용 움직였다.  밤 11시쯤, 오바마 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BBC특보가 담긴 내 노트북의 스크린을 남편에서 슬쩍 보여주곤 방을 빠져 나왔다.  폭발적인 괴음을 지른 남편이 잠시 후에 봉투 하나를 나한테 주고 바로 개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서늘한 밤 바람을 쐬고나면 남편도 좀 진정되리라 생각하며 그가 준 천 불짜리 수표를 보고 나는 혼자 쿡 하고 웃었다. 

지난 8년, 미국은 많은 변화를 거쳤다.  9/11 사태와 이라크 전쟁, 그리고 허리케인 카타리나등 굵직한 사건들이 미국의 속과 밖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최근 금융계의 사태도 불화에 기름이 되어 현 대통령과 같은 당인 공화당 후보를 완전히 코너에 몰았다. 

변화를 갈구하던 미국인들에게 변화를 외치며 나선 참신하고 의욕 많은 젊은 민주당 후보는 신선한 매력이었다.  막대한 숫자의 선거 운동원들과 자금 모금에 천재적인 전략을 발휘한 그의 치밀한 능력에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미국을 꿈 꾸었다.  미국인들은 불과 50여 년 전에 선거권조차 없었던 흑인을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인 미국의 대통령으로 뽑으면서 미국의 역사를 새롭게 쓰려고 한다.  공화당 후보의 경력보다는 현 상황에서의 변화를 선택한 미국인들이다. 

올 봄에 읽었던 책, ‘A Bound Man’ 을 쓴 흑인작가 Shelby Steele은 미국 사회의 맥박을 해석하며 오바마가 이길 수 없다고 내다 봤었다.  또 다른 정치 분석자의 말이 떠 오른다.  그는 아직은 흑인을 대통령으로 뽑을 미국사회가 아니라면서 공화당 후보가 살아 있기만 하면 그는 당연히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변한다.  나는 오바마 당선자의 입장 몇 가지에는 동조하지 않지만 미국의 근본적인 변화를 제시하는 그의 정책과 그의 열정을 믿고 싶다.  그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국으로 미국의 면목을 세우고, 피부색에 대한 미국인들의 성숙한 의식을 고무하고, 사회와 경제의 통합과 안정을, 특히 세상의 평화를 추구하는데 전력을 쏟아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새로운 가능성을 꿈 꾸게 하는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와 함께 나는 천 불의 수확을 거두었다.  근사한 시작이다.  철저한 보수 공화당인 남편이 앞으로 적응할 진통을 지켜보는 것도 새로운 재미 일터이다.  하지만 지금은 패배에 쓰린 남편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대접하는 여유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