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나는 화요일 밤에 예쁜 후배와 대화를 한다. 3년 전에 처음 만난 대학 후배인데 그동안 연락이 없다가 최근에 다시 연결된 사이이다. 중부 시간으로 자정쯤의 시간에 나는 켈리포니아에 사는 그녀에게 전화를 한다. 아주 적막한 시간대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문학과 글을 이야기 한다. 은연중에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는 동질 의식으로 우정이 쌓여간다.
영어권에 사는 나 와는 달리 그녀는 미국속의 한국에서 열심히 한글을 사랑하며 산다. 꾸준히 한국에서 일어나는 문학계의 동향을 파악하며 그동안 그녀는 좋은 글을 많이 써 왔다. 나는 미국 와서 한 30년 사용하지 않던 한글로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할 때는 내가 사는 이곳 남부를 한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였다. 하지만 순수한 열정으로 글을 열심히 쓰다 보니 잊고 있던 모국어와 내 뿌리를 되찾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기뻤다.
그런데 정작 더욱 내 생활에 생기를 주는 일은 예쁜 후배와 대화하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반사되어 돌아 오는 사실이다. 우리는 미국땅에서 오랫동안 각기 동양과 서양의 생활 방식으로 살아왔다. 우리가 미국에서 살아온 체험은 전혀 달랐어도 살며 느껴 온 삶에 대한 생각들은 참 비슷했다. 요즈음 우리가 가까이 산다면 아마 대단한 단짝이 되어서 낯선 곳을 누비고 다니며 같은 안목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의기투합 할 것 같다.
지난 화요일, 새벽 2시쯤 전화를 끊고 너무나 기이한 우연에 놀랐다. 그녀가 좋아한다는 시인의 이름을 말 했을 때 한국어로 받아 적으면서 나는 적당히 졸음을 쫒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그 시인의 이름을 입 안에 굴리다가 그만 잠이 완전히 달아 나 버렸다. 그는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일랜드 시인이 아닌가. “어쩜 세상의 수 많은 시인들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같은 사람일까?” 나는 이 동질감에 흥분했었다.
제임스 조이서와 사무엘 베켓의 나라, 예이츠와 셰이머스 히니의 나라에 두고온 내 가슴 한쪽을 예쁜 후배가 기억시켜 준 것이다. 새벽 2시에 유령이 되어서 찾아온 내가 사랑하는 아일랜드 작가들, 그들의 작품속의 주인공들과 그때부터 나는 함께 온 밤을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았다. 우리는 태어나서 자란 모국을 떠났고 뿌리 뽑힌 이민자로 외국에 살면서 국경을 허물고 의식도 때론 뒤죽박죽 혼돈 상태를 겪으며 살았다. 그러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의 혼돈을 후배 역시 그대로 느끼는 것이리라.
예쁜 후배가 보내준 새벽 2시의 유령들과 깨어 있으면서 나는 아일랜드와의 인연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일랜드를 유난히 사랑한다. 오래 전에 나는 아일랜드의 마법사들과 마녀들의 이야기에 매료 당했다. 그 후부터 틈나는대로 켈틱 음악을 즐겨 들었고 닥치는 대로 아일랜드 작가들의 작품에 빨려 들어갔다. 아일랜드 시인들의 암울한 시를 암송하며 안개비로 촉촉한 초원의 냄새와 거센 바람의 소리에서 생명의 의미를 찾았다.
그리고 나는 아일랜드를 찾아갔다. 8백년의 긴 세월 동안 영국의 지배하에서 버텨온 끈기와 고통이 응고된 나라 아일랜드, 그들의 슬픈 민요는 늘 가슴을 써늘하게 했다. 어쩌면 한국의 한 서린 민요와 닮은 점들이 많아서 쉽게 동감 하는지도 모르겠다. 바람과 비와 돌의 섬을 다니면서 그곳 작가들이 배경으로 글을 쓴 지역에 가서는 그곳의 낯익음에 털석 주저 앉고 싶을 정도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가슴 깊은 곳에서 쏟아 오르는 감격을 푸른 들판에 뿌렸다. 어이 어이 흩어져 나가는 내 정신의 한 부분들은 그렇게 그곳의 바람과 섞였다. 함께 여행한 가족들은 아무래도 내 영혼이 아일랜드산 이며 떠돌다 길을 잃고 한반도에 떨어 졌나 보다고 농담 할 정도로 나는 아일랜드의 모든 것에 철저히 몰입하고 행복했었다.
언젠가 예쁜 후배와 함께 아일랜드를 찾고 싶다. 천 년의 이끼가 끼인 회색빛 돌담을 따라 함께 걷고 싶고 수 천년 비와 바람을 버틴 고인돌도 함께 만져 보고 싶다. 우리가 가지는 기쁨이나 슬픔, 또한 아픔도 한갖 지나가는 바람임을 확인하고 싶다.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돌언덕 위에서서 우리도 작은 고인돌을 세우면서 삶을 축하하는 근사한 시를 쓰는 시인들이 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