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이 끼인 이번 주를 친정식구들과 보내려고 나는 먼저 미시시피로 향했다. 아일랜드 가수 마이클 론드라가 부르는 대니 보이 노래에 취해서 차를 몰다가 그만 90 마일로 달리는 순간 아찔했다. 남편이 옆에 앉아 있었다면 그는 질겁을 했으리라. 그렇잖아도 집 떠나기 전에 속도 내지 말라는 주의를 주었다. 앨라바마에서는 명절이 낀 공휴일 마다 경찰들이 도로에 많이 나서는 관습이 몇 년 전부터 생겼기 때문이었다.
주위를 돌아보니 과속 운전을 하는 사람은 나 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무엇이 그리 급한지 빠른 속도로 내 차 옆을 지나 갔다. 정신을 가다듬고 80마일쯤에 속도를 고정시켰다. 켈틱 노래는 언제 들어도 이상하리 만큼 가슴에 깊이 와 닿는다. 더욱이 아들의 귀향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애달픈 사랑의 노래를 들으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해 진다. 한과 정이 많은 한국의 고향을 떠올리니 ‘청산에 살으리랐다’ 라는 구절이 자연히 떠오른다. 지루하게 긴 65번 도로를 운전하면서 나는 고향과 청산의 상념에 빠졌다. 어릴 때 즐겨 찾아 갔던, 지금은 신기루가 되어 버린 외할머니가 사시던 고향의 집이 바로 나의 청산이 아니었을까.
이곳 남부에서는 태어난 곳에서 성장하고 그리고 평생을 살다가 죽는 사람들이 참 많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같이 자란 친구들과 삶의 태피스트리를 함께 짜며 나이 들어 가는 많은 이곳 친구들을 늘 부러워한다. 서로가 눈길만 주어도 가슴을 읽을 줄 아는 그들의 깊은 우정을 보면 너무나 정겨워 질투가 날 지경이다.
태평양을 건너오고, 그리고 이사를 많이 다니며 살다 보니 내가 가진 고향에 대한 감각도 많이 변했다. 군복을 입었을 때, 세상 어느 곳이든 공군이 발령을 내리는 곳이 바로 고향이라는 말이 군인들 사이에 있다. 그러나 나는 어릴 적 추억이 담겨있는 집들과 친척들, 그리고 옛 친구들이 고향이라고 믿었다. 이제 나이든 친척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고, 어릴 때 살던 집들은 흔적도 없어졌다. 언젠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찾아간 고향 도시는 너무도 많은 변화가 있어서 나는 길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고향은 흐릿한 옛추억이 되었고 모국은 나한테 타국이 되었다.
2년 전에 일본 여행 중에 우리 가족은 교또에 들렀다. 어느 골목 길을 지나다가 갑자기 남편의 표정이 굳어졌다. 여기가 50년 전에 그가 놀았던 동네 같다고 했다. 흥분해서 여러 골목을 빠르게 뛰다시피 돌아보던 남편은 드디어 부모와 살았던 옛 집을 찾았다. 집의 모습이나 앞 뒤뜰의 소나무도, 이웃 집들이나 그가 놀던 골목도 변하지 않아서 그는 뒤따르는 딸과 나를 잊어버리고 50년 전으로 돌아 갔었다.
한동안 횡설수설 울적 이는 감정을 주체 못하던 그는 마침내 우리에게 눈물을 보였다. 그 집에서 살았던 기억이 강한 충격으로 그를 몰았고 그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그의 부모를 그리워했었다. 낮으막한 담 너머의 소나무를 만지며 기억의 자락을 잡고 그 집에서 일어났던 어린 시절의 일화들을 처음으로 딸과 나한테 들려 주었다. 나는 추억이 담긴 정든 집을 다시 볼 수 있었던 그의 행운이 그렇게 부러웠었다. 돌아 와서 이곳 사는 친지들에게 남편의 옛 집을 찾은 체험은 최대의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나는 고향 집만 잃은 것이 아니다. 한국에 사는 옛 친구들과의 관계도 다른 환경에 오래 살다보니 관계가 소원해졌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길을 주며 서로의 가슴을 읽을 수 없었던 세월이 30년이 넘고 말았다. 이제는 상대에게 낯설어져 어쩌다 몇 년에 잠깐씩 만나던 버릇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렇게 40년이나 지켜온 우리의 우정은 시간과 환경의 테스트를 힘겨워 한다.
요즈음은 같은 문화 지역에 살면서 서로의 아픔과 기쁨을 공유하는 모국 친구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청산이 따로 있나. 청산에 들어가 머루나 다래를 따먹고 살기 보다는 마음 맞은 동향의 친구와 맛있는 커피를 나눌 수 있는 환경이 바로 청산이지. 남부에서 피켄파이나 바나나 푸딩을 좋아하는 한인 친구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내 미국 땅의 청산에는 추수감사절을 함께 감사하며 지낼 수 있는 친정식구들이 가까이 있어서 좋다. 올해는 우리가 선택한 나라의 명절에 모여서 칠면조 요리를 먹으면서 “청산에 살으리랐다”를 즐겁게 읊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