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22일
열흘 넘게 감기로 앓고있는 나.
혼자 조용히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쉬고 있으라며 랄라를 데리고 나가는 스톰을 배웅한 후, 몸을 씻고 한결 가뿐한 마음으로 혼자 남겨진 집안을 둘러본다.
소파의 쿠션들도 랄라의 인형들도 모두 제자리에 앉아있고, 약을 찾으러 부엌불을 켜보니 설겆이를 마친 식기와 컵들이 나란히 건조대 위에 올려져 있다. '흠...역시 스톰이군...' 이라는 생각을 안할수가 없다. 내가 씻은 그릇들은 삐뚤빼뚤 놓여져 있기가 쉽지만, 스톰이 설겆이를 한 날은 그릇들도 뽀사시한 모습으로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쉬고있으니까. 수도꼭지 옆에 꼬옥 짜서 얌전히 놓아둔 행주를 보니까 가슴이 뭉클해 진다. 부엌불을 끄고 식탁쪽을 보니, 랄라가 오늘 낮에 오레오 쿠키로 까맣게 범벅을 해놓았던 옷 한벌이 말끔히 떼를 벗고 걸쳐져 있다. 스톰이 어느새 이것까지 빨아 놓았나보다.
오늘 아침에도 목이 아파서 밥을 잘 못먹겠다고 했더니, 스톰은 아침일찍 슈퍼와 약국을 들러 과일과 약을 사다놓고는 급히 출근을 서둘러야만 했다. 사온 과일들을 정리하려고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보드라운 산딸기 한 소쿠리가 이미 선반위에 놓여있었다. '바쁘다면서 어느새 산딸기만 쏘옥 빼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을까...' 혼자 먹기가 너무 미안하고 아까워서 아직 산딸기는 만져보지도 못한채 그대로 있다. 스톰이 들어오면 야식으로 내놓아야 겠다.
우리 여자들은 깜짝 이벤트를 좋아하고, 풍성한 꽃다발에 웃음짓고, 값비싼 선물에 쉽게 감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눈 내리는 하얀 밤. 아픈 아내를 위해 함께 사는 우리집을 깨끗이 정리정돈 해준 뒤, 잠시나마 나에게 조용한 휴식을 선물해 주고픈 마음에 말괄량이 랄라를 데리고 밤속의 드라이브를 떠난 남편의 사랑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보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