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3월23일

혼수고 뭐고 아무것도 없이 시작한 우리의 신혼은 정말 남들이 들으면 엽기 그 자체로 들릴지 모른다. 전기밥솥을 장만한것도 결혼후 3개월 정도가 지나서 였으니까... 그럼 그 전까지는 뭐에다 밥을 해 먹었느냐? 커다란 냄비에다 밥을 앉혀서 먹고, 눌어붙은 누룽지는 숭늉을 끓여서 먹고 그렇게 소꼽장난 하듯이 살았다. 물론 내가 밥을 너무 많이 태운것이 전기밥솥을 마련하게된 큰 계기가 되었으리라는 짐작을 해보는데 그래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멈추지 않는다. 처음에 전기밥솥을 사러갔을때 우리둘이 나눈 대화는 거의 1970년대 당시 어느 중년부부가 처음으로 내집 장만을 했을때 좋아하는 수준이였으니까... 여하튼 그렇게 협소하게 시작한 부엌살림이 이제는 수납장이 좁게 느껴질 만큼 숫자가 늘었다.

지금 있는 그릇들의 대부분도 결혼 후 스톰이 한국에 출장 나갈때 (거의 두달에 한번 꼴로...) 마다 나도 같이 나가서 그냥 우리집에 있는 예쁜거 쓸만한거는 모조리 챙겨온거다. 작게는 간장종지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전골냄비까지 수없이 실어 날랐다. 그중에는 내가 너무 좋아해서 하나씩 하나씩 가방에 챙겨넣은 것도 있는 반면에, 우리 엄마가 이런것도 필요하니까 넣어가라고 해서 당시는 울며 겨자먹기로 투덜거리며 넣어온 그릇들도 있다. 그중의 하나가 이 사진에 있는 그릇이다. 엄마가 곰탕이나 비빔밥 먹을때는 커다란 그릇이 있어야지 먹기가 편하다면서 스톰이랑 나랑 쓰라고 두 개 넣어주셨을때 나는 크기만 크고 무겁기만 하다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런데 일단 가져와 보니, 이 그릇만큼 다용도로 쓰여진 것도 없지 않나 싶다. 곰탕이며 비빔밥 뿐만 아니라 쫄면, 칼국수, 떡국, 각종 찌개류를 푸짐하게 담아서 먹을수 있어서 좋았고, 설겆이 하고나면 뽀사시 하게 윤이 나는 것이 볼때 마다 믿음직스러웠던 그릇이다. 근데 어젯밤 설겆이를 마치고 그릇을 옮겨놓다보니 그릇의 한 부분이 깨져 나간 것을 발견한 것이다. 어제 설겆이 한 사람은 나 였었는데, 그릇을 들고 한참 속상해 하다 주방에 서성이는 스톰을 붙잡고, "이거 오빠가 깼어?" 하니까, 스톰이 웃으면서 "아이고~ 이제는 덤티기 까지 씨우시렵니까?" 하고 받아 넘겼다. 분명히 설겆이는 내가 했는데 어떻게 그릇의 한 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도 모르고 닦았는지... 혹시 파편이 남았나 해서 싱크대를 찬찬히 살펴봐도 물에 씻겨내려 갔는지 아무것도 보이지가 았았다.

그러고 수납장을 열어보니 부상당한 그릇들이 보인다. 그래도 부상자들은 누워있을 자리라도 있지만, 나의 부주의로 빨리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그릇들은 얼마나 가엾은가... 내가 12개 세트로 장만한 유리잔은 이제 딱 4개만 남았고, 스톰 친구분이 선물해준 값비싼 부부잔 중 하나는 내가 부엌 타일에 떨어뜨려 짝을 잃었고, 지금까지 태워먹은 남비와 주전자만 해도 몇 개 일까.... 그 뿐만 아니다 식기세척기에 넣었다가 부러뜨린 젓가락은 또 몇 개 인지...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양심상 부끄러움을 감추기가 쉽지 않다.

덤벙덤벙 촐싹촐싹 얌전히 집안일을 하지 못하고 죄없는 그릇들만 고생시키는 내가 오늘은 유난히 밉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