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7일

우리 옆집에 은빛의 단발머리에 자애로운 미소를 지닌 고운 할머니 한 분이 혼자 사시고 계신다. 매리 할머니께서는 35년전에 남편을 위암으로 잃고 그 후 두 딸을 홀로 키우셨고, 지금은 세명의 손녀딸과 랄라 또래의 증손자도 한 명 두고 계신다. 이곳으로 처음 이사오던 날 부터 우리에게 항상 친절하게 대해주셨던 분이시고, 랄라를 유난히 귀여워해 주셔서 복도에서라도 마주치는 날에는 랄라 머리도 쓰다듬어 주시고 한국에서 하는 쎄쎄쎄 같은 것도 가르쳐 주신 아주 자상하신 분이시다.

솔직히 나랑 스톰은 매리 할머니 연세가 대략 60세 정도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피부도 너무 고우시고 항상 숙녀같은 옷차림에 생기있는 얼굴표정이 아주 매력적이신 분이시다. 매리 할머니와 2년가까이 이웃으로 지내면서 할머니께서 지난날들의 이야기를 몇 번인가 들려 주셨었는데, 당시 랄라가 한창 말썽 부리던 때여서 할머니의 이야기는 늘 중간에 뚝뚝 끊어질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는 동안 할머니께서는 한 번은 침대에서 떨어지셔서 심한 타박상으로 고생하시고, 한 번은 오븐청소를 하시다가 팔에 화상을 입으셔서 오랜 시간동안 서로 만날수가 없었다. 몸이 완전히 회복된 매리 할머니께서 지난달 우리집 문을 두드리셨고, 우리는 한참 할머니의 건강과 요즘 랄라의 유아원 생활에 대해 이야기 한뒤 날씨 좋은날 근처 카페에 가서 맛있는 커피와 케익을 사주시고 싶다는 말을 남기시고 가셨는데 워낙 추웠던 날씨탓에 우리는 계속 약속을 연기해야 했었다.

드디어 기온이 영상으로 돌아왔고, 바람도 산들산들~ 커피 한잔 하기는 딱 좋은 계절이 온 것이다. 할머니는 오늘도 곱게 단장을 하시고 나오셨고, 우리는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산책도 할겸 동네 한바퀴를 돌아서 카페로 갔다. 이번에는 꼭 제가 사드리고 싶다고 몇번이나 말씀 드렸는데, 매리 할머니께서 난 널 손녀딸 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자꾸 너가 사겠다고 하면 당신께서 몹시 서운하시다고 하셔 더이상 고집을 피우지 못하고 이번에도 맛있는 케익과 산딸기차를 선물받았다.

그렇게 카페 한 켠에 자리를 잡은 매리 할머니와 나는 나이와 인종과 문화를 뛰어넘어 정말 같은 여자로서 공감할수 있는 이야기들로 함께 웃고 울고 아쉬워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께서 35년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는데 어찌나 두분의 사랑이 아름답고 깊은지 듣는 나도 말씀하시는 할머니도 계속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야만 했었다.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며 칠전 병실에서 할머니께 이런 저런 당부를 하시면서 두 가지 약속을 제안하셨는데 할머니께서는 한 가지는 지켰지만 나머지 한 가지는 지키지 못했노라고 고백하셨다.

두 가지의 약속이란
"매리, 난 당신의 단아한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그 곱고 우아한 모습을 평생 간직하기 바라오."
"매리, 당신은 아직 젊고 아름답고 너무 사랑스러운 여인이오. 내가 죽으면 부디 좋은 사람을 만나 재혼을 해요. 당신처럼 사랑스러운 여인은 꼭 사랑 받고 행복해져야 하오."

암선고를 받으시고 키모 테라피가 시작된 후 9개월간, 할아버지께서 너무 위독하니 병원에 입원하여야 한다는 주치의의 권고가 있을때까지 할머니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할아버지를 위해 깨끗한 비닐 봉지 한장과 사기그릇, 할아버지가 토하시고 나서 입을 닦으실 깨끗한 흰 손수건 한장과 물 한 컵을 작은 쟁반에 담아 하루에 수십번도 더 갖다드렸다고 한다. 한번 쓰고 다시 세탁기로 들어갈 그 손수건까지도 언제든지 반듯하게 다림질을 해서 준비해 놓으셨다고 하니...

매리 할머니께서 말씀 하시기를 "내가 남편과의 두번째 약속을 지킬수 없었던 것은 그이가 너무 많은 사랑과 아름다운 추억을 내게 남겨주고 떠났기 때문이란다." 젊은시절 매리 할머니께서는 큰 키에 글래머한 외모를 가졌던 언니에게 열등감을 느껴 작은키에 외소한 체구를 가진 당신의 외모에 자신이 없으셨다고 한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만나신후 자신감을 되찾으셨고, 사랑받고 있다는 그 행복감에 만취해 지난 세월을 살아오셨다는 매리 할머니. 35년전 할머니 곁을 떠난 남편을 떠올리시며 지금도 그이는 너무나도 좋은 남자였다고 말씀하시는 매리 할머니.

오늘도 할머니의 왼쪽 손목에는 할아버지가 쓰시던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아직도 할머니의 마음을 꼭 감싸안고 계신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