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15일 

난 책을 무지 좋아한다. 읽는 것은 물론이고 그냥 곁에 책이 있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가슴이 설렌다. 책은 바라만 봐도 나의 심장 박동수를 빠르게 하는 각성제 역할을 한다. 철학 시간에 교수님이 각자 원하는 유토피아를 머릿속에 그려보라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난 그때 산중에 있는 작은 암자에 햇살 잘 드는 아담한 방하나를 얻어, 손때 묻은 앉은뱅이책상을 앞에 두고 도톰한 방석 위에 정갈히 앉아 책을 읽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가지런히 쌓아 올린 책들이 방 한구석을 가득 매울 만큼 있고, 누군가 끼니때마다 산채 비빔밥이나 따끈한 영양솥밥을 준비해 주고, 틈틈이 향 좋은 차를 방에 넣어준다면 나에게는 유토피아 그 자체인 것이다. 

내가 제일 먼저 책을 접하게 된 건, 다섯 살 무렵 할머니께서 천자문을 집에서 가르쳐 주시면서 였다. 때마침 비슷한 시기에 피아노를 배우게 되면서 까맣고 동그란 음표가 그려진 악보가 그림책처럼 느껴졌던 기억도 있다. 어린 시절에는 세계 동화 전집 또는 셜록 홈즈의 추리 소설 시리즈를 즐겨 읽었고,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아빠가 에센스 국어사전을 선물해주셨는데, 그 당시 나는 하루 종일 국어사전만 들여다보고 살았다. 내가 모르는 우리나라 말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고, 더욱더 많은 단어를 이해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래서 두껍고 깨알 같은 글씨가 적힌 그 사전을 매일 책가방이나 피아노 가방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틈만 나면 읽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 입학 무렵부터는 역사와 정치 관련 서적을 좋아했는데, 아빠가 구독하시던 시사 잡지를 읽다가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나오면 사전에서 뜻을 찾아보는 재미가 아주 짜릿했던 기억이 있다. 고등학교까지도 나의 역사/정치/사회/문화/언어에 대한 관심은 계속 이어졌지만, 동시에 감수성 충만한 시기였던 만큼 시집을 사 모으는 취미에 흠뻑 빠졌던 때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사와 정치학에 대한 호기심은 점점 깊어져 갔고, 국제정치학과를 대학에서 전공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 선택이었다. 

나는 배움에 대한 진지한 열정을 품고 대학 생활을 시작했지만,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쓰인 방대한 양의 전문서적을 읽고 이해하는 일은 몹시 버겁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넉넉하지 않았던 체력은 금세 바닥이 났고, 새벽까지 계속되는 공부는 힘들었지만,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나는 정말 열심히 읽었다. 읽고 또 읽는 방법 외에 다른 방편은 없었다. 어렵게 과제물을 하나 마치면 또 하나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무조건 읽어야 했다. 마음 같아서는 시,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책이 읽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공부를 위해서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고, 취미로 책을 읽는 것은 당시의 나에게는 사치였다. 다행히 시간이 흐르면서 차차 영어에 익숙해졌고 그 무렵 영문학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드디어 전공도서로부터의 해방이 찾아왔다. 나에게도 평소에 읽고 싶었던 책들을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언제든지 서점에서 보내는 시간은 달콤하고 행복했으며 아주 오랜만에 책과 함께 시간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스톰과 결혼을 한 뒤에도 독서의 리듬은 계속 유지되었다. 신혼 시절 스톰이 출근길에 Barnes & Noble 서점에 나를 내려주면, 나는 거기서 책들과 놀다가 퇴근길에 다시 만나 집으로 향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정말 그때만큼 다양한 책을 원 없이 오랫동안 읽어 본적은 내 생애 없었지 싶다. 조용한 독서를 즐기고 싶은 날에는 Foster City 시립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화려했던 나의 핑크빛 독서 인생은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해지면서 오로지 뱃속의 랄라만을 위한 태교로 전환되었다. 너무 어렵거나 긴 문장의 책은 아기가 지루해할까 봐, 일부러 리듬감이 있는 Nursery Rhymes과 시를 찾아 읽었고, 되도록이면 고운 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했다. 배가 불러오면서 예전처럼 바닥에 편하게 앉아 책을 읽거나, 도서관의 구석구석을 찬찬히 둘러보며 흥미로운 책을 찾는 놀이를 즐기기는 어려워졌지만, 동그란 배를 만지며 책을 읽는 그 평화로움은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예정일보다 일주일 앞서 우리 랄라가 태어났고, 이제는 뱃속이 아닌 내 곁에 누워있는 작은 랄라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매일 밤 잠들기 전 나는 랄라의 귀여운 발가락을 매만지며 동화책을 읽어주었고, 랄라가 커가면서 우리는 함께 책을 읽었다. 이제는 오히려 랄라가 나한데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동안, 내게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랄라가 12개월에서 24개월이 될 때까지의 1년이었다. 동화책을 약 2년간 (임신 후부터 읽기 시작했으니까) 계속 읽다 보니, 머리가 정말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내게 슬픔으로 다가왔고, 난 예전에 읽던 전공도서들과 어렵지만 읽고 나면 머리가 개운해지는 철학 서적이 너무도 읽고 싶어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금에서야 고백하건대 육아와 함께 포기해버린 독서라는 취미 생활이 너무 그립고 슬퍼서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더랬다.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 말은 진리였다. 우리 랄라가 쑥쑥 자라서 유아원을 가고, 엄마로서의 노하우가 쌓이면서 나의 독서 인생도 다시 탄력을 되찾았다. 몇 년간 소홀히 했던 문학 도서를 읽기 시작하고, 좋아하는 화가와 시인의 작품집을 틈틈이 읽는 시간이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바삭바삭 메말라가던 뇌세포는 다시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러한 세포들의 미세한 움직임이 커다란 물결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할 무렵, 나는 대학원 진학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제는 대학원생이 되어 새로운 전공도서를 읽고, 곳곳의 대학도서관들을 찾아다니며 여러 심리학자들의 원서를 구해 읽는 재미에 빠져있다. 책을 사랑하는 나에게는 꿈결 같은 일이다. 이제는 어디에서든지 편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을 수 있을 만큼 배도 날씬해졌고, 그런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스톰과 커피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정말 큰 변화는 그다지 책을 가까이하지 않던 스톰이 나의 추천도서를 한 두 권씩 읽기 시작했고, 요즘 들어서는 출장 갈 때마다 "이번에는 어떤 책을 읽을까?" 하면서 사뭇 호기심에 찬 눈으로 서가를 살피며 내 의견을 묻게 되었다는 점이다.

나 혼자 즐기는 독서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가족과 함께 책을 벗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쁘고 신나는 일인가. 앞으로도 우리 가족이 서로의 관심사를 존중하면서, 소중한 사람을 대하듯 책과도 그런 귀한 인연을 이어나가길 소망한다. 연말을 맞아 나의 지나온 독서 인생을 뒤돌아보니 어려움 속에서도 책을 향한 마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 다행스러울 뿐이다. 이런 뿌리 깊은 책을 향한 나의 사랑이 곧 시작하는 새해를 힘차게 맞이할 용기와 희망을 선물해 주기도 한다. 앞으로도 책과 함께할 나날들을 꿈꾸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