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며칠 전에 가정불화를 겪고 계신 한 미씨님께 전화를 할 일이 있었습니다.

한참 수신음이 울리길래 끊으려는데 저 쪽에서 받으시더군요.

여보세요? 했는데 응답은 없고 멀리서 우당탕 뭔가 집어 던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를 지르는듯한 남자 목소리도 뜨문뜨문 끊겨서 들려오고. 흐느끼는듯한 여자의 음성도 들리고. 아이들 소리 같은 소리도 들리고. 또 뭔가 깨지는듯한 소리...

제가 그 때 운전중 이었는데, 한참을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가 멍하고 숨쉬기가 힘들었습니다. 단 일분 남짓의 시간동안 경찰에 연락을 해서 핸드폰 위치 추적을 해야 하나, 당장 어디로 달려가야 하나 (제가 그 분 주소를 몰랐습니다),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러볼까, 왜 전화를 눌렀을까, 나한테 도움을 청하는 거였을까, 오만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을 들어보니, 주머니 속에서 버튼이 눌러져서 제가 연결이 된 걸 모르고 계신 거 같더군요.  그 쪽의 상황도 그저 주변에서 아이들이 뛰어 다니고, 그 분은 병원 같은데서 (뜨문뜨문 들리는 대화 내용을 자세히 들어보니 의사와 상담하시는 거 같더라구요) 상담 받으시는 거 같고.. 주머니 안에서 흔들리는 소리가 뭘 집어던지는 듯한 소리로 들린 거 같더군요.. 저와 친분이 있는 분이 아니라 나중에 사실 확인은 못 했지만, 한참 가만히 듣다 별일 아니란 결론이 섰을 때 전화는 끊었습니다.

그 일이 있을 후 며칠을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이사 준비 하느라 몇 시간 못 자는데.. 거의 매일밤 꿈속에서 울다 깬 것 같습니다. 한동안 있고 있던 어릴적 기억이 되돌아와 저를 모질게 괴롭히더군요. 제가 참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긴 사람이고, 성격도 여자보다는 남자에 가까운 사람인데.. 큰 소리만 나면 식겁을 합니다. 심하게 싸우는듯한 소리만 나면 숨이 잘 안 쉬어 지구요. 공황상태가 됩니다.

저는 엄마를 때리는 아빠, 아이들을 때리는 엄마, 동생들을 때리는 언니, 동생을 때리는 저, 이런 이상한 먹이사슬 같은 구조의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물론 늘 이런 건 아니었죠. 좋을 땐 참 좋았습니다. 하지만 아빠가 이성을 잃으시면 괴물로 변하셨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밝고 씩씩한 저였지만, 아무도 모르는 사이, 저는 어둡고 폭력적인 아이로 크고 있었습니다. 5학년때, 담임 선생님께서 방과후에 남으라고 하셨습니다. 학급 일로 심부름을 시키시려나 했는데, 선생님이 아이들이 다 가고 나니 책상 위에 제 일기장을 내려 놓으시며 읽어 보라고 하시더군요. 제가 워낙 뭘 읽는 걸 싫어해서 제가 쓴 글도 안 읽는 경향이 있어서.. =.= 처음으로 제가 쓴 일기를 읽었나 봅니다. 그리고는 너무 놀래서 할말을 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욕설에, 죽고싶다 내지는 죽이고 싶다가 들어 있더군요. 참... 몇 달을 아무 내색 없이 제 이런 일기를 읽으신 선생님께 어찌나 챙피하고 죄송스럽던지... 다행히 선생님이 연세가 있으시고 저를 귀여워해 주시던 분이라... 혼을 내시기 보다는, 아무래도 네가 이런 일기를 쓴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거 같아 보여주는 거라고 하시더군요.. 오학년때 은사님 덕분에 저의 욕설 일기는 끝을 맞이 했지만, 언니에게 맞고 동생을 때리는 생활 패턴은 몇 년을 더 갔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건, 전 다 커서까지, 남들도 다 그러고 사는 줄 알았다는 겁니다. 맘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소리부터 지르고, 주먹부터 불끈 지고..  (물론 집 안에서만요) 그래서 사실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었습니다. 동생을 때렸듯 내 아이도 때릴 것 같아서요. 그리고는 제 아이가 어렸을 때, 윽박 지르고, 때리기도 하고.. 솟구치는 화를 미친듯이 억제를 하려고 노력 했지만, 가끔 미친년이 돼 있는 자신을 보며 얼마나 절망했는지 모릅니다. 다행히 제 삶이 안정을 찾고, 좋은 남편을 만나고,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면서, 제 anger management issue는 거의 치료가 됐습니다만.. 아직도 5,6년전 말도 잘 못하는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손찌검을 했던 제 지난날이 떠오르면 죄책감에 너무도 괴롭습니다.

맞고 살아도, 아이들 때문에 그냥 산다는 분들, 이제 그 얄팍한 핑계에서 벗어 나세요. 경제적으로 독립할 자신이 없어서? 더 나은 놈 만날 자신이 없어서? 혼자 아이 키울 자신이 없어서? 이혼한 후 행복할 자신이 없어서? 이유야 얼마든지 있겠지요. 어차피 본인의 인생이고, 본인이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할 결정이니, 남이 아무리 이래라 저래라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다만, 애들 때문에라는 핑계는 대지 마세요. 폭력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 이혼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들 이상으로 정신적인 피해 입습니다. 경제력이 없으면 만들면 됩니다. 본인 상태가 엉망이어서 더 좋은 놈 못 만날 꺼 같으면 본인을 다지고 가꾸면 됩니다. 혼자 아이 키울 자신이 없으면 도와줄 사람을 찾아보면 됩니다. 하지만 "애들 때문에"라고 이유를 붙여 버리면, 해결 방법은 없어집니다. 애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애들아빠가 어떻게 얼마나 학대를 하건, 그냥 붙어 살아야 하는 거니까요. 나중에 애들 아빠가 바람이나 나서 뒷통수 제대로 쌔려주기 전까진 말이죠..

너무 복잡한 문제라.. 생각이 잘 정리가 되질 않네요. 지난 며칠간 매일매일 어떻게 이 주제를 갖고 글을 올려야 하나 고민 했는데도.. 별로 정리가 안 되는군요. 양해해 주시구요. 아직 jurisdiction에 관한 글도 마저 올려 드려야 하고, 아이들 데리고 한국 나갔다가 납치로 몰리신 뉴져지 바이올리니스트 관련해서도 글 올려드려야 하고, 이혼에 엮인 파산의 문제들도 글 올려드려야 하는데... 짐 싸는 것도 급해서요. 언제 시간을 낼 수 있으련지.. 되도록 빨리 하나하나 올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건강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