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근을 앞둔 나에게 남편이 진지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다짐을 했다.

미국인 직장동료들과는 절대로 사적인 농담,특히 성과 관련된 농담을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별 뜻없이 상대방에게 건넨 성적 농담 한마디가 상사에게까지 보고되어 문제가 되고 쫓겨나가는 경우를 수도 없이 봤으니 '우짜든지간에 입조심 하라' 는 것이 남편의 주의였다.

특히 같은 여자끼리라도 상대방의 외모나 취향에 대한 언급은 절대 조심하라고 남편은 신신당부했다.

평소 실없는 소리 잘하는 내 성격을 친히 잘 아는 남편이었던지라 혹시라도 평소의 언행대로 하다가 불미스러러운 일이라도 당할까 봐 꽤나 염려가 되었던 모양이다.

아무려면,그럴려고..

남편의 당부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첫 출근을 했는데 슈퍼바이저가 두꺼운 지침서를 건네주었다. 읽어보니 남편이 당부한 것들이 고스란히 다 실려있었다.

상대방의 외모에 대해 말하지 말것이며,절대로 性과 관련된 농담을 하지말 것이며,책상에 본인것이든 배우자것이든 수영복 차림의 사진을 두지 말것이며,상대방의 특정부위를 쳐다보지 말것이며........

미국 직장내의 성희롱 문제로 소송이 많기로 이렇듯 엄격하다니, 아예 입은 딱 봉하고 눈을 내리깔고 다니는 게 수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특히 동성끼리라도 성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 금한다는 조항에서는 기가 질리고 말았다.

지침서 대로라면 다른 여자나 남자를 가리켜 흔히 '저 여자 몸매 예쁘다' '저 남자 참 섹시하게 생겼네"라고 무심코 하는 표현들이 모두 성희롱에 해당된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업무에,새로운 사람들에,새로운 분위기에 잔뜩 긴장했었는데 하지말라는 것 투성이인 직원 지침서까지 읽고나니 더욱 마음이 잔뜩 얼어붙고 말았다.

아닌게 아니라 누구에게나 다 그렇겠지만 첫 직장에서의 처음 한두달은 긴장의 연속일 것이다. 모든 것이 새롭고 모르는 것 투성이이니 살 얼음판을 걷듯 조심조심 행동을 해야할 것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그런데 누가 말했던가.사람은 환경에 빨리 익숙하는 동물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차차 업무에 익숙해지고 나자 고인 물같이 조용하고 엄숙한 직장분위기가 못견디게 심심해졌다.그렇다고 아무나 붙잡고 농담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옆책상에 앉아 있는 여자와 친하려고 노력해 보았다.

나와 동갑인 아랍계 여자였다. 미국 온 연도도 비슷하고 취미도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녀 역시 직원 지침서대로 행동을 하는지 형식적인 이야기외는 일절 하지를 않았다.그렇게 그저 몇 달을 무미건조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이에 비해 몸매가 무척 좋은 그녀가 몸에 딱 달라붙는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 일을 왔다.

'원피스가 니 섹시한 몸매에 너무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해주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혹시라도 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일까 봐 입을 딱 다물고 있다가 퇴근할 무렵에야 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그랬더니 이게 웬걸,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눈에 띄게 기뻐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니?니눈에 진짜 섹시해보이니?사실 오늘 저녁 애인이랑 데이트가 있거든"

남자랑 석달동안이나 사귀었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진전이 없어 오늘 밤은 아예 작정을 하고 일부러 섹시한 옷으로 골라 입었단다.

"어때? 어쩌면 역사가 이루어질 것 같지?잘 되면 내일 이야기 해 줄께"

형식적인 업무 이야기 외엔 조개처럽 입을 다물던 여자였지만 일단 내가 운을 떼놓으니 온갖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왔다.

맵시 좋은 상대방한테 맵시좋다고 칭찬하는 것도 '성희롱'에 걸려들지도 모르니 삼가라는 직장 분위기에서 내가 던진 한마디에 이렇듯 좋아하며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는 그녀는 직장인이기 전에 맵시에 관련된 칭찬을 좋아하는 여자였다.

그녀를 보며 미국 직장, 나아가서 사회전체가 성희롱에 대해서 너무 과민반응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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