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이 나간후 K씨가 전화를 해왔다. 사실 그동안 창피해서 대놓고 말은 못했지만 영어때문에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었는데 내 글을 보고 여기 동지가 또 있구나, 하고 많은 위로를 받았단다. 그러면서 아닌게 아니라 영어는 미국에 사는 한 영원히 우리를 괴롭힐 '적' 이라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는 말했다. "걱정 마세요. 비록 우리가 영어때문에 괴로움을 겪을 망정 한국말 하나는 시원하게 잘 하고 있쟎아요." K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그럼 한국말 못하는 한국사람도 있어요? 한국사람이 한국말 잘 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게 무슨 소리요?" 그렇다. 이민 1.5세나 2세들이야 미국인이나 다름없으니 그렇다치고 이민 1세인 한국사람이 한국말 잘 하는 건 아주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그런데 나는 철들어 미국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잊어 버려 잘 못 쓴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간 A씨와 B씨이다. A씨는 40년 전에 미국에 유학와 이곳 모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던 사람으로 한인단체장을 몇 번 역임하던 사람이었다. 그가 공석이나 행사의 연단에 서게되면 본론에 들어가기 전 반드시 하는 말이 있다. '한국말이 서툴러서 죄송한데 이해하시고 들어주십시오' 였다. 아무리 40년 전에 미국에 유학와 미국대학에서 교수를 해도 그렇지, 서른 넘어 미국 온 사람이 한국말에 서투를 수도 있는지. 그런데 웃긴 건 그 양반이 한국말이 진짜 서투르냐면 그것이 아니라는데 있다. 나랑 원고 타이핑 일 때문에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한국말이 서툴기는커녕 당시 한국의 유행어도 꿰고 있을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했다. 그런데 왜 사람 열 명 이상 모인 자리에만 가면 갑자기 그 유창한 한국말이 서툴러지고 영어만 나오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미국대학 교수니만치 영어는 잘했지만 발음은 완전 한국식이었다. 내 남편 이름인 scott을 그는 '스캇' 이 아닌 '스카트' 라고 발음했다. 미국생활 40년만에 한국말은 서툴러졌는데 어찌 고등학교 때 배운 발음만은 안 잊어 버렸는지..) 또 한사람 기억에 남는 사람은 한국말을 아예 깡그리 잊어 버렸다는 B씨다. 당시 그녀는 카운티 한 부서의 책임자 일을 맡고 있었다. 한국인이 좋은 자리에 있으니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서 인터뷰라로 할 요량이었는데 우연히 어떤 한인 단체 모임에서 그녀를 보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우선 내 소개를 하고 이름을 물었다. "........"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때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무슨 말을 묻는지 전혀 알아 들을 수 없다는 듯한 어리둥절한 표정... 누군가가 옆에서 '그 여성은 열 여덟 살에 미국왔는데 15년 동안 미국학생들 틈에서 공부만 하고,졸업하고는 미국 직장에만 다니느라 한국인을 상대할 새가 없어 한국말을 다 잊어 버렸단다' 하고 설명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녀가 청각장애잔 줄 알았을 것이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라는 말도 알아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자. 뭐 이런 게 있나 싶었지만 꾹꾹 참고 영어로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그때서야 한국 成 '장' 을 최대한 영어 발음으로 가르쳐 주었는데 '장' 이 영어발음으로는 '챙' 이라는 것을 그때 나는 처음 알았다. 인터뷰고 나발이고 그 다음부터 그녀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미워하는 여자가 되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되었다. 아니, 그래, 백 번 양보해서 한인이 단 한명도 없는 곳에서 15년이 아니라 25년을 살았다 치자. 어떻게 자기 나라 말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그녀는 미국생활 15년동안 한국에 계신 부모나 친지한테 전화 한 통도 안하고 살았는가? 한국에 계신 부모나 친지가 영어를 알아 들었을 리 없고 분명히 한국말로 통화를 했을텐데 말이다. 한국말도 한마디 못한다면서 그냥 미국사람들이랑 미국사회에서나 어울릴 일이지 한인사회엔 뭐하러 나왔을까. 나는 우리 아버지가 어릴 때 배운 일본 말을 일흔이 넘어서도 막힘 없이 술술 하는 하는 걸 보았다. 10살까지 일본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후 60년동안 단 한번도 일본 말을 쓸 기회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15년 만에 자신의 모국어를 잊어 버릴수 있을까. 우리직장에는 아홉 살에 미국와 30년동안 미국에 살았으면서도 한국말이 완벽 그 자체요, 한국어로 된 소설책까지 척척 읽는 한국 아가씨가 한 사람 있다. 캔더스란 아가씨인데 그녀를 볼 때마다 기특한 마음이 든다. 만약 A씨와 B씨에게 이 아가씨 이야기를 해 주면 그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 두 사람이 지금 이 지역에 없는 게 참 유감이다. -이계숙의 글을 더 읽으시려면 오른쪽 위 링크를 클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