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면허증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맥주 한 팩을 사기 위해 들른 미국 슈퍼마켓에서 황당하게도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아무리 미국 사람들이 동양인의 나이를 가늠 못한다고 해도 그렇지,내가 어딜 봐서 미성년자 같나, 사십을 넘긴 지가 언제인데....

농담으로 웃어 넘기기엔 캐쉬어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나는 조금 겸연쩍어하며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맥주가 든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데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실실 나왔다.

참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군. 이 나이에 신분증 제시를 다 요구받다니...운동을 하면 피부가 탱탱해진다더니 운동을 하도 많이 해서 주름이 줄어 들었나?

사실 나는 5,6년 전만 해도 알콜음료를 사기 위해서는 신분증이 꼭 필요했었다.
특히 미성년자 주류판매에 대한 법이 매우 강화되면서 신분증 없이는 와인 한 병 사기조차 어려웠었다.
'내가 이래 어려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십이 가까운 나이' 라고 아무리 간곡하게 설명을 해도 캐쉬어들의 단호한 태도는 바뀌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그냥 쓱 한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알콜음료를 계산해 주기 시작한 때가.
그 때의 기분은 뭐랄까,시원하고도 섭섭한 것이었다.
이제는 일일이 귀찮게 신분증을 꺼내 보이지 않고도 자유롭게 알콜음료를 살 수 있어 좋다는 해방감과 신분증을 보이지 않아도 될 만큼 나이가 들어 보인다는 것에 대한 우울함.

잔뜩 기분이 좋은 채로 집에 돌아와 맥주 사면서 신분증제시 요구받은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남편은 미간에 주름을 모으더니 혹시 그 캐쉬어가 남자가 아니었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남편 왈

"내 생각에는 니가 하도 예쁘니까 그 캐쉬어가 아마 이름이나 주소를 알아내려고 일부러 신분증을 보자고 했을 것 같다"

하여튼 남편의 눈에 덮힌 콩깍지는 오래도 간다.

며칠후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 이구동성으로 그 캐쉬어가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을 거라고 한목소리를 낸다.
그렇지 않고서야 눈가며 입주변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사십대 아줌마에게 신분증을 보자고 했을 리가 없단다.
누구는 또 한술 더 떠 "그 슈퍼마켓이 어디에 있는지 좀 가르쳐 줘 봐라. 나도 가서 맥주 한번 사 보게"라고 이죽거리더니 "두린가 셋인가 하는 총각한테도 이 이야기 해주었냐?"고 묻는다.

두리는 내가 단골로 다니는 한국마켓의 캐쉬어이다.
스무살이 채 되지않아 보이는 귀여운 총각인 두리는 인사도 잘하고 상냥할 뿐더러 손도 매우 빨라 나는 늘 그가 맡은 계산대에 줄을 선다.
그런데 두리에게 한가지 불만이 있는데 그가 늘 나를 아줌마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첨에 "아줌마!" 하고 불렀을 땐 난 그가 나를 부르는지도 몰랐다.
왜냐면 그 때까지도 나를 아줌마로 부른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10여년 넘게 신문 일을 했던지라 주위로부터의 내 호칭은 항상 '이기자' 였다.
신문 일을 놓은 지 1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내 호칭은 이기자로 통하고 있는데 어느날 처음으로 '아줌마' 라는 호칭을 들었으니 어리둥절 할 수 밖에.

'망할 녀석.그래도 나는 지가 예쁘다고 항상 지 라인에만 섰건만,감히 나를 아줌마래?'

엉겹결에 계산을 하고 라인을 빠져나오긴 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고녀석이 괘씸했다.
태어나서 처음 아줌마라고 불리운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혹시 그날따라 내가 아줌마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나,백미러로 머리모양을 살펴 보고 내 차림새를 내려다 보기까지 했었다니까.

'하긴, 사십 살이 넘었으니 아줌마는 아줌마지.두리가 잘못한 게 뭐가 있노....'

삼십이 넘어 보이는 사람한테 아줌마, 아저씨보다 더 편한 호칭이 또 어디 있을까?.

얼마 전 한국인 직장동료랑 몇몇이서 새크라멘토에서 차로 세시간 거리의 산으로 하이킹을 갔다. 바다가 보이는 산길을 왕복으로 12마일을 걷는 하이킹이었다.

바닷바람이 세차게 부는 산길을 점심과 물이 든 베낭을 짊어지고 걷는다는 게 보통 힘이 드는 일이 아닌지라 모두 헉헉 댔다. 특히 돌아오는 길은 더 기진맥진들이었는데 두 사람만은 쌩쌩했다.
평소 뛰고 걷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와 헬스클럽에서 체력단련을 한다는 O씨였다.

오십대 남자인 O씨와 사십대 여자인 나는 몇 마일 이상이나 뒤쳐진 사람들을 뒤로하고 날 듯이 걸어서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12마일이나 걸었는데도 O씨나 나나 땀을 약간 흘린 것 외엔 말짱했다.
물을 마시며 그늘에서 느긋하게 쉬고 있으니 한참후에야 도착한 삼십대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아니,웬 노친네들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그래? 그 체력들 진짜 대단하시네."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암,대단하고 말고. O씨는 키가 1미터 80이 넘으니 키에 따라 다리라도 길지.이 짧은 다리로 삼십대인 니네들을 몇 마일이나 앞서 온 나는 진짜 대단하단다.'

두리가 나를 또 아줌마라고 부르면 그땐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그래, 두리야. 나 아줌마야. 아줌마 맞긴 맞는데 난 보통 아줌마가 아니고 씽씽 날아 다니는 아줌마란다. 바닷바람 맞아가며 산길 12마일 걷고도 끄떡없는 아줌마 지금껏 본 적 있냐, 너?"

두리의 얼굴 표정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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