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한국마켓에 갔다가 머리숱이 형편없이 적은 한 여성을 보았다.

사십이 채 안되었을까? 화장한 거로 보나 옷차림새로 보나 멋에 꽤 신경을 쓰는 여성 같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심각한 탈모를 앓고 있는 것 같았다.

 머리 전체 숱이 적은 데다 불빛에 드러난 머리 정수리 부분은 아예 훤히 속이 들여다 보일 정도였다.

그녀는 휑한 정수리 부분을 감추느라 옆 머리를 애써 빗어 올려 붙이고 있었는데 예쁜 얼굴에 그 머리모양은 더 할 수 없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검은 콩을 드셔 보세요."

"네에?"

이 주책을 어찌할까? 어떻게 참아보려고 해도 안된다.

심한 탈모로 고생하다 검은 콩으로 치료한 후에는 머리빠진 여자만 보면 나도 모르게 다가가서 검은 콩을 먹어 보라고 권하는 버릇이 생겼다.

나야 좋은 마음으로 그랬다치지만 생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뜬금없이 검은 콩을 먹어보라고 말하니 상대방은 얼마나 황당할까?

탈모.

그 고통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쓸어 올릴 때마다 손가락 사이로 한웅큼씩 빠져나오던 머리카락들, 하루라도 청소를 해 주지 않으면 곧 막혀 버리던 샤워실의 배수구 구멍, 아무리 조심해 빗어도 가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지던 머리카락, 머리카락들....

그동안 나는 단 한번도 내 머리숱에 대해, 머리결에 대해 고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공평한 하나님은 내게 멋진 외모대신 숱많은 머리결을 주셨다. 게다가 남들 다 하는 퍼머나 염색을 안해서인지 내 머리결은 유난히 빛나고 건강해서 미용실에 갈 때마다 미용사의 찬사를 받았었다.

적어도 탈모란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안겨준 그 약을 복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항상 더부룩하고 쓰린 증상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중국인 여의사는 별다른 설명이나 주의없이 내게 처방전 한 장을 끊어 주었다.

알파벳 Z로 시작되는 위장약이었다.

약을 복용한 후 한달이 지나자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벽마다 나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던 속쓰린 증상이 없어진 것이다. 탈모가 시작된 시기도 아마 속쓰린 증상이 없어지는 것과 함께였을 것이다.

하루는 남편이 배큠을 하는데 갑자기 배큠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배큠 밑바닥을 살펴보던 나와 남편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배큠 롤러에 뒤엉켜서 회전을 방해하고 있는 수십만개의 머리카락들!

그 머리카락은 모두 까만색, 내 머리카락이었다.

놀라서 얼른 목욕탕으로 달려가 불을 환하게 켜고 머리속을 쳐들어 보니 세상에! 얼마나 머리가 많이 빠졌던지 속이 거의 휑했다.

언제부터인가 머리를 뒤로 모아 묶는 핀이 헐겁다 생각은 했었지만 무심히 지나쳤는데 나는 어느새 중증 탈모환자가 되어 있었던 거였다.

"그 독한 약을 별다른 주의 사항도 없이 복용하게 하다니..."

눈물을 흩뿌리며 부랴부랴 달려간 병원에서 나를 진찰한 늙은 의사는 혀를 끌끌 찼다.

약에 대한 부작용이라고 했다.

중국 여의사는 그 병원을 그만 두었다고 했다.

마음 같아선 병원을 상대로 고소라도 하고 싶었지만 고소를 한다고 한번 빠진 내 머리카락이 다시 쑥쑥 나올 리도 없을 터,그냥 경험없는 애송이 의사의 실수로 넘어 가 주기로 했다.

나와 머리카락의 전쟁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세상에서 탈모만큼 치료하기 힘든 병이 또 있을까? 좋다는 샴푸는 다 써보았고 세수 비누로도 몇 달 머리를 감아 보았으며 그 좋아하던 모자도 쓰지 않았다. 한 병에 백불 가까히 하는 약도 1년 넘게 발라보았다.

그러나 별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도 탈모는 치료되지 않았다. 아니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 몇 년 동안 쏟아부은 돈과 시간을 환산한다면 아마 몇 만불은 족히 될 것이다.

"아이고,아이고. 그렇지 않아도 못난 인물에 머리카락까지 죄다 빠졌으니 앞으로는 창피해서 밖에도 못 나겠네.이를 어째, 진짜 이 일을 어찌 해!"

워낙 낙천적인 성격이라 웬만한 일엔 마음을 상하지 않는 나였지만 갈수록 표가 나는 머리를 보면 나도 모르게 꺼이꺼이 울음이 나왔다.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긴 했지만 여의사가 눈앞에 있다면 박박 쥐어뜯고 싶을 정도로 탈모에 대한 공포는 깊고도 심각했었다.

그랬는데 탈모 치료법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바로 식초에 절인 검은 콩, 속청이었다.

첨엔 식초에 절인 콩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반신반의 했었다. 여러가지 치료법에 하도 많이 속아본 경험때문이었다.

그런데 복용한 지 두어달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탈모가 중단되었다. 아울러 빠진 자리에 새카만 머리카락들이 다시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 때의 그 기쁨이란....

세상을 다 얻는 기쁨이란 바로 그런 걸 두고 말하는 것이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탈모에 대한 걱정은 완전히 벗어났다.

예전의 숱많고 윤기나는 머리결을 가지려면 앞으로도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 하루에도 한웅큼씩 빠지던 증상은 완전히 없어졌다.

탈모로 고생하는 사람이 있다면 검은 콩을 권하고 싶다.

식초에 절인 콩은 오래 장복하게 되면 치아에 이상이 올 수도 있으니까(식초가 치아 상아질을 약하게 한다)그냥 밥에 넣어 먹는 방법을 택하면 된다.

석 달 이상만 먹으면 탈모가 중단되는 걸 느끼게 되는데 단, 유전적 탈모에는 별 효과가 없다는 걸 밝혀 둔다.

-이계숙이 쓴 단편소설, 픽션, 꽁트 등의 글을 더 보시려면 오른쪽 위 링크나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kyes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