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모여서 밥도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하는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

이 달은 이 집, 다음 달은 저 집, 돌아가면서 모이는데 모일 때는 모두 한가지 씩 음식을 해 가지고 가는 것으로 하므로서 집을 빌려주는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로 했다.

밥을 먹고난 다음에 마시는 커피나 후식은 보통 집주인이 낸다.

그동안 모임 사람들의 커피 취향은 딱 두 가지로 나뉘었었다.

영주권자 커피, 그리고 시민권자 커피.

그런데 최근 식당일을 하는 K씨가 합류하면서 한 가지 커피가 더 늘었다.

이름하여 '불법체류자 커피'.

시민권자 커피는 블랙 커피이고 영주권자 커피란 설탕, 크림이 다 들어간 커피인데 K씨가 즐기는 불법체류자 커피는 영주권자 커피보다 설탕과 크림이 더 듬뿍 들어 간, 이른바 죽같이 걸쭉한 커피란다. 그래서 각양각색의 커피취향을 맞추고자 집주인은 세 가지 커피를 타내야 한다.

내 취향은 영주권자 커피쪽이다. 우리 모임에서 Y씨,L씨,K씨등 나와 취향이 맞는 사람이 제일 많다.

우리와 동조하지 않고 시민권자 커피, 즉 블랙커피를 시키는 사람은 K씨와 J씨 두 사람이다. 두 사람에 의하면 커피는 블랙으로 마셔야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즐길 수 있단다. 설탕, 크림이 들어가면 향이 죽을 뿐만 아니라 맛도 텁텁해지기 때문에 싫단다.

그들의 말에는 약간의 우월감이 섞여 있다. 커피 본연의 맛도 즐길 줄 모르면서 무슨 커피를 마신다고 그래, 하는 듯한.

아닌게 아니라 미국온 지 10년, 20년이 넘도록 아직까지 영주권자 커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보다 K씨와 J씨가 좀더 세련돼 보이는 게 사실이다.

꼭 그들 때문이 아니라 나도 좀 우아해 보이고 싶은 생각에 아무것도 타지 않은 커피를 한두번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한 잔을 다 못 마시고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난 애당초 우아하기는 글렀군. 15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는 고집스런 이 입맛을 어찌할꼬!'

설탕과 크림을 탄 커피는 아무래도 블랙커피에 비해서 덜 고상한 이미지이다. 그리고 설탕, 크림을 탄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블랙커피를 마시는 사람보다 미국생활에 덜 익숙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름도 '영주권자 커피'라고 붙였는지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이런 커피를 '파출부 커피' 또는 '양촌리 커피' 라고 부른단다.

파출부들이 남의 집에 일하러 가서 주인이 없으니까 '니 꺼냐,내 꺼냐' 하면서 커피도 듬뿍, 설탕도 듬뿍, 크림도 듬뿍, 뭐든지 듬뿍 넣어 마시는 커피이기 때문이란다.

또 양촌리 커피란 한국연속극 '전원일기' 에 나오는 농촌 마을, 양촌리 사람들처럼 촌사람들이 마시는 '촌스런 커피' 이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라고 했다.

블랙커피에 한두번 도전하다 실패한 뒤로는 블랙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 괜스리 시비를 걸어야 속이 시원한 버릇이 생겼다. 마치 높은 포두나무에 열린 포도를 따기 위해 서너번 시도하다 따지 못하고 '저 포도는 시다' 고 자위하며 돌아서는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말이다.

"당신, 진짜 블랙커피 맛을 제대로 알고나 마시는 거야? 맛도 모르면서 괜히 우아한 체 폼 잡는 것 아니야?"

"커피는 뭐니뭐니 해도 설탕, 크림이 다 들어가야 제 맛이 나지. 쓰고 시기만 한 커피를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지? 차라리 한약을 마시고 말겠다."

시비를 걸면서도 속은 편치 못하다. 왜냐? 솔직히 그들이 부럽기 때문이다.

오만상을 찌푸려야 한모금 넘길 수 있는 쓴 커피를 아주 맛있는다는 듯이 눈까지 지그시 감고 음미하는 그들이 진짜 부럽다. 부럽다못해 배가 아프다.

아무것도 타지 않은 커피를 못 마실바에야 아예 커피를 마시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한 때는 커피를 끊기도 했었다. 우아와 세련은 둘째치고라도 영주권자 커피에 들어가는 엄청난 양의 설탕과 크림이 아무래도 몸에 좋을 리는 없다는 걱정에서였다. 그러나 커피없이 사는 세상은 너무 무의미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는 제일 흔히 나오는 게 커피인데 남들 다 마시는 커피를 혼자 마시지 않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도 고역이고 천년만년 오래 살겠다고 그렇게 좋아하는 커피도 끊었다고 눈총받는 것도 싫었다.

얼마전부터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음료를 꼽으라면 커피를 꼽을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는 나인데 건강에 조금 해가 된다한들 무슨 대수일까.

오늘도 나는 출근하기 전 휴대용 머그컵 가득 커피를 탄다. 운전하면서 마실 생각이다.

요즘들어 내 커피는 점점 더 불법체류자 커피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

대형 할인매장에서 사 온 업소용 크림과 설탕이 두어달이 안되어서 다 떨어진다. 건강을 생각해 조금만 넣으려고 노력해 보지만 맛을 생각하면 그게 마음대로 안된다.

듬뿍 퍼 넣고도 건강에 나쁘지 않은 설탕과 크림 어디 없을까?

-이계숙이 쓴 단편소설, 픽션, 꽁트 등의 글을 더 보시려면 오른쪽 위 링크나 아래를 클릭하세요.

 http://kyeso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