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씨가 저녁초대를 했다.
지난 봄 결혼한 후 처음으로 하는 초대였다.
시집가는 날 등창난다더니 나는 하필이면 초대받은 날을 기해 지독한 독감에 걸
려 거의 운신도 못할 지경으로 아팠다. 그러나 이번에 안가면 그 유명한 L씨의
이북 만두를 못 얻어 먹을 거라는 주위의 협박에 못이겨 끙끙 앓으면서도 갈 수
밖에 없었다.
소문대로 신김치를 듬뿍 넣은 이북식 만두는 별미중의 별미였고 어저께 담구었
다는 겉절이 김치와 L씨의 새남편이 앞마당에 숯불을 피워 구웠다는 조기는 둘
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만큼 훌륭했다.
몸이 아픈 중에도 입맛은 어찌 그리 생생하기만 한지, 아이 머리만한 만두를 여
섯 개나 먹어 치운 후 식탁에서 일어서는데 식당 구석에 놓인 화병에 꽃힌 빨간
장미꽃에 눈이 갔다.
발렌타인 데이는 아니고 결혼기념일은 아직 멀었을텐데 웬 장미꽃이냐니까 L씨
가 부엌에서 일을 하다말고 수줍은 듯 대답한다.
"그저께가 우리 만난지 1년 째 되는 날이었쟎아.그래서 우리 그이가 사다 주었
어."
"나 원, 나이 오십이 내일모레인 사람들이 결혼 기념일도 아닌 무슨 1년 만남 기
념일씩이나.."
내가 이죽거렸더니 L씨의 남편이 "나이 오십이 아니라 육십이라도 기념할만한
건 해야지요"하고 웃는다.
부엌에서 그릇을 씻던 L씨가 대답했다.
"그러엄,그게 사람 사는 정이고 부부의 정이지. 기념일 챙겨 주는데 나이가 무
슨 상관 있어?"
언뜻 보니 L씨의 얼굴에 빨갛게 홍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한꺼번에 들이닥친 대여섯 명의 음식을 해대느라 더웁고 열이 나기도 했었겠지
만 L씨의 얼굴에 피어 오르는 것은 숨길수 없는 행복이었다.
김이 피어오르는 부엌에서 앞치마를 두른 채 서있는 L씨는 꿈처럼 행복해보였
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 일만 남았네. 부디 잘 사세요..'
내가 L씨를 안 건 지금으로부터 10년이 넘는다.
내가 보기엔 참으로 열심히그리고 성실하게 사는 것 같았는데 지난 10년동안 L
씨의 삶은 썩 행복하다고 볼 수가 없었다. 아니 어찌보면 불행했다고 볼 수가 있
다.
남편의 바람과 이혼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인간관계의 배신에서 오는 실망과 회
한이 지난 10년동안 늘 그녀의 어깨를 누르고 있었으니까.그런데 나는 지난 10
년동안 단 한번도 L씨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본 적이 없다.그녀는 항상
밝았으며 늘 웃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겉모습만 본다면 그녀가 혹독한 인생의
쓴경험을 겪고 있는 사람인지 전혀 모를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도 사람인지라 가끔 신세한탄을 할 때도 있었는데도 그마저도 '이
세상 남자들이 모두 눈이 삐었나 봐. 왜 나같은 여자를 혼자 썩혀 두노" 하는 말
로 주위를 웃기곤 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도 '그래.언니같이 예쁘고,살림 잘하고,싹싹하고 따뜻한 마음씨
를 가진 사람이 또 있겠노. 조금만 기다려 봐, 곧 나타나겠지"하고 위로를 했었
었다.그랬는데 어느날 거짓말같이 짠,하고 마음에 쏙 드는 남자가 나타났고 곧
결혼을 했으며 지금 우리를 초대해 만두를 해 먹이고 있는 것이다.
항상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더니 이제 진짜 행복을 만난 것이었다.
L씨같이 힘든 상황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여성이 내 주위에 또 한
사람 있는데 바로 Y씨다.
나는 Y씨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프다.
내가 만약 지금 Y씨가 처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어찌할까,생각만으로도 몸서리
가 쳐진다. Y씨의 프라이버시이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은 밝힐수 없지만 앞 뒤를
돌아보고 사방을 둘러봐도 지금 Y씨의 현실은 그저 캄캄하고 암담하기만 한 것
같다.그러나 Y씨는 여전히 밝다. 밝을 뿐만 아니라 명랑하기까지 하다.
인터넷에서 얻어들은 조크를 전해 우리를 늘 박장대소케 하는 Y씨를 보노라면
Y씨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잊으려 일부러 저러는 것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
도이다.
언젠가 Y씨에게 어쩌면 그런 현실속에서 항상 그렇게 웃고 다닐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는데 그때 Y씨는 "응, 내가 좀 모자라서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할 줄 모르
거든." 하고 대답했다.
정말이지 그녀의 밝은 얼굴만큼 밝은 삶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아는 사람은 알지만 나역시 별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온 장본인이다.
그러나 나도 앞의 L씨나 Y처럼 항상 밝게 웃으며 살았다.
단 한번도 내 처지를 비관하거나 한심해 해 본 적 없다.
지금은 고달프지만 미래는 밝은 것이라는 희망을 늘 가지고 살았다.
다행히 지금은 모든 것이 안정되고 편안하다.
나는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풍족한 삶이 늘 밝게 웃으며 살아온 결과의 산물이라
고 믿는다.
몇년 전 장래가 촉망되는 여배우 하나가 우울증을 앓던 끝에 자살을 했다고 본
국이 떠들썩했었다.
그녀가 출연했다는 영화나 드라마는 하나도 접하지 못했었지만 신문이나 인터
넷으로 그녀의 사진을 몇 번 본 적이 있다.
볼 때마다 느낀 건 '참으로 처연하고 청승맞다' 였다.
내가 본 그녀의 얼굴이 연출에 의해 찍힌 것인지는 알 수는 없으나 사진속의 그
배우는 묘할 정도로 우울하고 침울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생전 웃음이라곤 모르는 여자같은, 한 마디로 음울한 느낌의 배우였었다.
그런 느낌은 나만 가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자살 후 그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평소 그녀의 분위기가 늘 칙칙하고 무거웠
다고 전하고 있었다.
내면을 덮고 있던 우울이 겉에까지 배어나와 삶에까지 영향
을 끼친 경우인 것 같다.
만약 그녀가 일부러라도 밝게 웃으며 살았더라면 지금 결과는 조금 다르지 않았
을까 생각해 본다.
삶이 우리를 속이더라도 가능하면 밝게 웃으며 살자.
행복이란 놈은 항상 밝은 자리만 찾아가는 습성이 있단다.
-이계숙이 쓴 칼럼과 소설,픽션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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