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메고 걷는 일은 며칠 사이에 익숙해졌다. 우선 두 손이 자유로워서 좋았다. 걸으면서 친구와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에 무엇이 들어갔는데 울어서 눈물을 흘리면 나을 것 같아” 라던 친구에게 나는 근래에 일어난 슬픈 사연들을 줄줄이 들려 주었다. 멀쩡하던 대학
1학년 아들이 자살한 청천벽력 같은 일을 당하고 휘청이는 토박이 친구와 교통사고로 애완견을 잃은 여동생, 암투병하는 주변인들, 그리고 병으로 육신이 고통을 받아도 굳건한 믿음으로 주를 앙모하는
지인. 가슴이 멍해지는 대소사를 겪는 지인들을 소개하면서 친구 몰래 눈가를 닦았다. 순례길에서 그들의 평안을 위한 기도를 하던터였다.
남의 불행이 우리의 불행, 바로 세상살이 였다. 마음이 겸허해지니
친구가 고은 시인의 시를 읊었다. 제목이 ‘그 꽃’ 이라는 시는 ‘내려갈 때/보았네/올라갈 때/보지 못한/그 꽃’ 이란 짧은 시다. 앞만 보고 목적을 향해 살 적에는 안중에도 없던 소소한 일들이 훗날 여유가
있으니 눈안에 들어온다는 함축된 뜻을 오랫동안 음미했다. 그러다보니 길가의 작은 풀꽃도 예사롭지 않았다. 성경의 이야기속에서 불변의 믿음과 인간의 한계와 진정한 삶의 의미를 구하기도 했다. 남편과 나누지 못하는 무거운 주제들을 옛친구와는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순례길의 묘미는 다양했다. 평화로운 농촌을 지나며 마주친 소떼가 경이로웠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지않던
개들도 정겨웠다. 지나는 마을마다 시도 때도 없이 닭 훼치는 소리와 소똥 냄새가 검은 흙에 질펀했지만 농가의
담을 장식한 활짝핀 장미꽃 향기들이 발란스를 맞추어 주었다. 세월의 이끼가 잔뜩 끼였던 돌담을 따라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산길과 오솔길을 걸으니 어두운 생각들은 걸려져 나가고 우리는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This is
living!” 감탄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리고 외진곳에 있던 주인없는 무인가게들 조차 천연덕스럽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날이 갈수록 우리의 침묵은 길어졌다. 수시로 찾아오던 비와 바람소리가 천연의 끈기로 상념을 흩었지만 우리는
각자 나름의 의식에 빠졌다. 우리에게 길을 안내하던 새소리는 늘 우렁찼고 녹음이 짙은 숲의 공기는 신선한
에너지로 우리를 에워쌌다. 그렇게 자연에 도취되어 걸으니 마음의 문이 저절로 열렸고 세상의 이치가 안으로
흘러 들었다. 나의 아이들이 내 삶의 흔적이듯 등에 업힌 배낭도 내 삶의 무게였다. 시간이 지나며 더욱 가벼워지는 삶의 무게가 안타까워 한 걸음씩 발을 떼며 살아온 시간을 아쉬워했다. 슬프게도 내가 남긴 발자국은 먼저 걸어간 수 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섞여서 흔적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1987년 파울로 코엘료가 ‘순례자’ 책을 발간한 후부터 세계에서 산티아고를 찾는 순례자가 급격히 늘었다. 프랑스 국경근처에서 산티아고로 향한 길이 여러 순례길 중에 가장 인기있는 길이 되었다. 그 길을 유럽에서 찾아오는 순례자들과 한인들이 선호했다. 특히 한국에서는
2010년인가 한 TV프로그램에서 스페인을 소개한것이 인기를 끌면서 까미노 열풍이
일었다. 2013년 순례자를 국적별로 보면 한국인들이 세계에서 6번째로
많은 숫자를 기록할 정도로 걸으면서 미국인보다 더 많은 한인을 만났다.
만난 한인들은 등산을 좋아하고 먼저 걸었던 사람들이
발간한 책들 읽고 충동을 받아서 왔다고 했다. 사실 거의 모든 젊은
한인들은 실업자라는 한 남자의 실토처럼 우리가 만난 많은 젊은 남녀는 걸으면서 자신의 삶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년퇴직하고 순례길에 나선 사람들도 많았다. 15년을 벼르다가 드디어 남편이 퇴직하자
친구들과 함께 왔다는 우리 또래의 여자는 그동안 한국에서 등산을 자주하며 훈련을 해왔다. 준비없이 덜컥 덤벼든
친구와 나는 눈을 맞추고 웃었다. 우리는 분명 용감했다.
어느 곳에나 ‘알베르게’ 라는 단체 합숙소는 여럿
있었고 호텔이나 팬션은 별로 없었다. 순례자들은 보통 아침 일찍 길을 나서서 오후 2-3시 정도 되면 알베르게를 찾아 멈추고 빨래를 해서 말리거나 쉬면서 서로 친분을 다졌다. 우리도
가는곳 마다에서 다행스럽게도 화장실이 딸린 깨끗한 방을 구했다. 감사기도 드리고 하루종일 등에 업혔던 아기를
침대에 내려놓고 등산화를 벗었다. 필요한것 별로 없던 단순한 일상에는 감사한 일들만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