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과 견과류는 세상에서 가장 잘 어울리는 궁합이다. 어떤 선물 바구니에나 과일이 있으면 빠지지 않고 견과류가 끼인다. 말린 과일이나 견과류가 들어있는 달콤한 초콜렛은 생각만해도 침이 고인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의 푸르트 케이크는 럼에 절인 여러 종류의 과일 조각들과 견과류가 화끈한 콤비를 이룬 환상의 맛을 가졌다. 우리 가족은 그 맛에 중독되어 있다. 남편이 워낙 좋아하는 바람에 겨울이면 푸르트 케이크는 우리집 냉장고에 상주하는 디저트이다.

사람관계도 마찬가지로 과일과 견과처럼 찰떡궁합으로 어울리는 부부가 있다. 그들은 다이내믹한 기류를 형성하며 주위사람을 즐겁게 해준다. 평소 나다니며 놀기를 좋아하는 내가 봄바람을 타자 딸이 따라 나섰다. 우리는 남쪽 시골을 돌다가 걸프만 바닷가 포구도시인 페어홉 (Fairhope) 으로 갔다.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과일과 견과처럼 잘 어울리는 부부를 만난 행운을 가졌다.

페어홉으로 가는 해변도로의 꾸부정한 시골길은 꼬박 졸고 있었다. 천천히 운전하며 포구를 둘러 싸고 있는 정경을 보여주니 딸도 졸려서 하품을 했다. 즐겨 찾는 화랑앞에 차를 세우고 딸을 앞세웠다. 남부를 그리는 화가는 친절하게 우리가 골른 모든 카드에 사인을 넣어 주었다. 몇 블럭 걸으면서 화랑과 특산물 가게를 돌다가 커피숍에서 쉬었다. 운치있는 통나무 의자에 높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장식한 산뜻한 꽃들에 마음을 주었다. 스노우 버드들은 북부로 떠났고 주중이라 한산했다.

맛있는 디저트를 파는 가게에 들렀다가 마주보는 앤틱숍에 들렀다. 긴 통로를 걸으며 어지럽게 진열된 자잘한 물건들을 살폈다. 새것보다 비싼 가격이 붙은 물건을 지적했더니 딸이 냉큼 대답했다. 세월의 때가 묻었으니 비싸야 하지 않느냐고. 노인들이 존경받는 것과 같다는 바람에 키득 웃음이 나왔다. 가게를 지키던 여자에게 ‘파이어 킹' 제품을 물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딸이 “남부 사투리가 매혹적으로 섞인 외국어 발음을 가졌다”고 지적한 것이 대화의 문을 열었다. 그녀는 독일계 이민자 에다 (Edda Gilbert)였다. 열심히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의 뒤로 그녀의 남편인 영국계 이민자 에릭 (Eric)이 다가왔다. 유럽을 들락이며 사는 이 부부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천성이 밝은 수다꾼들이었다. 앤틱숍은 그들의 취미생활이었다.

줄줄이 쏟아져 나온 그들의 이야기가 무척 재미있었다. 어릴적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한 에다는 이모집에서 만난 미군과 결혼했다. 독일주재 미군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며 군신문에 사진을 제공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이 셋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앨라배마의 항구도시 모빌에 왔다. 그리고 독일계 의사의 주선으로 지역 의과대학에서 전문 사진사로 23년 일했다. 에릭은 1970년에 무역계통 일로 미국에 이주했다. 모빌의 친구집을 방문했다가 에다를 만났다. 불꽃 튄 첫 만남 후 두 사람은 새살림을 차렸다.

언젠가 영국 BBC방송에서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넘버 원’ 지역이라며 앨라바마 페어홉을 다큐멘타리로 소개했다. 그것을 본 이들은 퇴직하자 모빌의 대저택에서 페어홉의 작은집으로 주저 없이 이사했다. 그집이 과일과 견과류의 거리 이름을 가진 주택지에 있다고 하자 내 속에서 웃음이 거품되어 올라왔다. 그러잖아도 속으로 이 부부를 과일과 견과에 견주고 있던 터였다. 에다가 미국 시민권을 받던 날, 친구가 축하 케익에 ‘Nut’이라 썼듯이 자신은 괴짜라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이주해 온 많은 특색있는 사람들이 이웃이라 심심하지 않으니 “페어홉으로 이사오면 재미있는 노후를 보낼것”이라며 나를 유혹했다.

딸이 영국 여행길에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여러 지역을 방문한 이야기를 하니 찰스 디킨스 시절의 사람같은 에릭은 향수에 젖어버렸다. 에릭이 열심히 이야기를 시작하면 에다가 흥분해서 중간에 낚아채었다. “나도 이야기하고 싶어”하던 에릭의 목소리는 에다의 드라마틱한 큰 음성에 눌리곤 해서 우리는 웃음을 감추질 못했다. 에다가 독일 스튜트가르트의 고성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자 친근감이 들었다. 일본계 남편을 그 도시에서 만났고 딸이 그곳에서 태어났다고 했더니 에다가 대단히 반가워했다. 더욱 딸이 대학졸업후 한국에 가서 영국남자를 만났고 앨라바마에서 결혼한다니 에다가 책을 쓰야겠다며 요란하게 박수를 쳤다. 그녀 말처럼 사람의 인연이란 진실로 절묘하다. 그들과의 만남 또한 재미있는 우연이었다. 그들이 우리 모녀에게 보여준 것은 국경선이 없는 세상의 지도와 오픈 마인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