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 한 토박이 친구가 “나 세상 떠날 적에…”라며 말해준
것이 마음 한곳에 거북스럽게 멈추어 있다. 싱싱한 초여름의 푸름에 둘러싸여 살면서 가슴에 시한부 생명의 한을
품고 있으니 마치 소화불량에 걸린것 같다. 죽음에 대비하는 그녀의 자세를 보니 죽음에 대한 나의 준비가 없어서
불안하다.
우리들 주위에 암치료를 받는 지인들이 부쩍 늘었다. 그들의 투병을 지켜 보면서 마음 아파하다가 만약에, 만약에 우리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린다면 하는 추상적인 대화가 있었다. 최근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웃을 지켜본 친구는 그러잖아도 자신은 남편과 그 문제를 오랫동안 상의했다고 했다. 이웃집 남편이 암
진단을 받고 4개월 후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 집에서는 웃음소리가 멈추질 않았다고 한다. 떠나는 남편이나 보내는 아내는 평소에 그들이 좋아하던 일을 하며 장례식 준비까지 다 했다. 보통 사람은 상상할 수 없는 대범스런 처신이었다.
행복하게 웃으며 세상을 떠난 이웃을 보고 죽음을 맞이하는
새로운 지혜를 얻었다는 친구는 지난달 “나 세상을 떠날적에”하며 그녀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만약에 그녀 자신이나 남편에게 불치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지면
그들은 치료를 거부하기로 했다. 그리고 6개월간 세계일주하는 크루즈의
일등 승객으로 세상과 이별여행을 하기로 했다. 평소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이다. 해마다 전세계 여러 지역을 찾아 나서는 이 부부가 세계일주 여행을 계획하는 것은 좋은데 치료를 거부하기로 한 결심이 마음에 걸렸다.
삶에 대한 애착심으로 5퍼센트의 가능성도 잡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떠날 적에 가진 재산을 털어서 화려한 팡파르를
울리겠다고 선언한 그녀의 결정은 쉽게 그리고 갑자기 내린 것이 아니다. 가끔 지나는 말로 예고를 했었다. 텍사스에 사는 그녀의 여동생이 오래전부터 치매로 고통을 받고
있다. ‘긴 병에는 효자 없다’더니 여동생의 남편이 간병에 지쳤는지
작년에 아파트 하나를 구해서 아내를 내보내고 간병인을 붙여주었다. 아직 50대인 여동생은 집이나 아파트나 주거에 대한 인식이 없을 정도의 상황이라 동생을 방문하고 올 적마다 친구는 영육이 아파서 돌아왔다.
그럴적마다 자신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가족들을 괴롭히며
조금 더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싶지 않다고 했었다. 자식은 다 커서 독립했으니 투병하며 지쳐서 삶을 마감하는것 보다 차라리 화끈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다가 떠나겠다고 여러번 각오를 다졌었다.
이웃 남자의 행복했던 마지막을 본 그녀의 남편도 이제는 같은 마음이 되었다. 두
사람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들의 결정에는 뭔가 아쉬움이, 가슴 깊이에서 올라오는 거부감이 있다. 마지막 순간까지, 끝까지 투쟁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나는 아직 남편과 이런 주제의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죽음에 관한 대화나 사후문제를 준비하지 않고 오늘의 삶을 열심히
사랑하며 사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만약 우리 부부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떤 대처를 할지 이제는 사전에 준비를 해야함을 강하게 느낀다.
그리고 윌 슈발브 (Will Schwalbe)가 쓴 책, The End of
Your Life Book Club에서 만난 어머니, 투병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마치려고
노력한 메리앤을 떠올린다. 암치료를 받는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읽은 책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재발견과 동시에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뭉클한 과정이 있다. 모자의 끈적한 사랑이 바탕에 있지만 조금씩
세상살이를 내려놓는 어머니의 용기가 아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님을 가르쳐 주며 책을 통해서 아들과 나누는 교감이 감동을 준다.
며칠 전, “나 세상 떠날적에” 라 해주었던
친구를 찾아갔다. 아름다운 꽃 향기를 맡으며 우리는 맘껏 행복했고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매 순간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며 기쁨을 가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장 해야하는 자잘한 일들이 집 안밖에서 어른거리지만 이제는 힘에 부치는 나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고목의 둥치같은 몸이 예전처럼 가뿐하게 움직여주질 않는다며 그녀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해야 할 일을 제쳐놓고
보고싶은 친구를 만나러 나섰던 나 역시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니 우리들의 오늘 일은 자연스레 내일 일로 바뀐다.
내일로 밀려난 일들을 열거하며 나 세상 떠나고 나면
그 일들은 나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 된다하며 우리는 통쾌하게 웃었다. 이런 억지를 죽음에 부려볼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