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은 단연 가족 친지들의 만남의 장이다. 6월에 있었던 딸의 아름다운 가든 결혼식은 두 가족이 대서양을 건너 인연을
맺은 국제행사였다. 이어서 클럽의 볼룸에서 가졌던 리셉션은 다양한 피부색 지인들과의 즐거운 해후의 장이었다.
청첩장을 준비하며 딸이 특별히 부탁을 했다. 우리가 살면서 쌓은 친분이 두터운 지인들 중에서 자기가 아는 사람들만
초대해달라는 것이었다. 리셉션 자리에서 신랑과 테이블을 다니면서 인사할 적에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 형식적인
인사를 하기가 싫다고 했다. 결혼 당사자의 소망을 존중해서 딸이 어릴적부터 알던 지인들만 초대했다.
드디어 결혼식 이틀 전부터 해외 4개국과 미국 9주에서 가족 친지들이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왔다. 손님들의 도착시일과 공항이 달라서 온 가족이 분산하여 애틀란타와 몽고메리 공항으로
뛰었다. 그들의 숙박과 교통편을 준비하는 것은 도전이었지만 한사람씩 도착하면 반가움이 우선했다.
17 호텔방에 짐을 풀은 손님들의 음식 대접과 운송은 ‘드림 팀’이 나서서 해결했다. 한 토박이 친구는 결혼식 전날 신부와 웨딩파티 여자 10명을 집으로 초대해서 점심을 대접해 주었다. 남부인의 후한 인심이었다.
특히 반세기 전에 남편과 대학 기숙사 방에서 인연을
맺은 ‘데이비드’가 왔다.
오랜 세월 남편과 신의를 지켜온 ‘데이비드’는 켄터키 주에서 9시간 반을 운전해서 내려왔다. 그는
두살때 소아마비로 불구자가 되어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이지만 성격이 밝고 유머감각이 뛰어나다. 딸이 독일에서
태어났을 적에 찾아왔었고, 또 우리가 한국에 근무할 적에도 찾아 왔었다. 독일이나 한국, 장애인을 위한 설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서 휠체어 밀고 다니기에 애로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여러 관광명소를 찾아가서 에피소드를 일으키며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다. 사람살이 고비를 넘길적 마다 그는 남편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리고 나의 고교시절 친구 ‘CE’가 한국에서 왔다. 우리의 인연도
남편과 데이비드 못지않다. 굴곡진 세월45년을 이어온 의리다.
그녀는 내 딸의 결혼소식을 듣고 올 봄에 나의 한복을 맞추어서 보내주었다. 그녀가
한국에서 보낸 소포를 받은 날, 보들보들한 실크의 강렬한 핑크 색에서 뿜어나온 광채가 집안을 밝혔다.
내가 입을 한복이 자신의 하얀 드레스를 위축시킬것이라며 딸이 걱정을 했지만 주름살과 튀어나오는 흰머리를 완벽히 커버해주는
눈부신 화사함에 나는 기분이 좋았다.
몽고메리의 Blount문화공원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
가든’은 이름 그대로 영국풍의 정원이다. 옆에 있는 연극극장 지붕 위에
펄럭이는 영국기가 정원에 가득한 셰익스피어 작품에 나오는 향료들을 앞세우고 영국손님들을 반겼다. 꽃향기 은은한
정원에 들러리들을 옆에 세우고 선 남부 신부와 영국 신랑은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렸다. 남들은 딸을 결혼시키는
엄마의 눈물로 보았지만 정작 나에게는 우리의 즐거움을 함께 하려고 멀리서 힘겨운 방문을 해준 사려 깊은 가족과 지인들에 대한 벅찬 감동이었다.
그렇게 소중한 가족과 친구들에 둘러 싸여서 우리 부부는 딸을 결혼시키는 기쁨을 배로 즐겼다.
클럽의 볼룸 여기저기 테이블에 둘러 앉은 100명의 다민족 지인들을 가만히 살펴보니 그들은 남편과 나의 살아온 수
많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기쁠때나 슬플적에 나에게 힘을 주던 CE는 바로 또 하나의 나였다. 그런 평생 친구가 손을 잡아주니 결혼식날 일어난 예기치 못한 일들에
당황한 순간들도 마음에는 평안이 있었다. 누군가 나이 들어서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나눌수 있는 진정한 친구가
한사람이라도 있다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했다. 남편과 나는 분명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결혼식 참석겸 휴가차 해외에서 찾아온 손님들은 결혼식
다음날 남편과 딸들의 안내로 밴 3대에 분산해서 모두 바닷가
휴양지로 떠났고 CE와 나는 ‘땅위의 천국’인 천주교 묵상지로 향했다. 그곳에서 작년에 체험했던 기적을 좋은 친구와 함께 겪고 싶었다.
침묵 피정을 하던 4명의 신학생과 멀찍이 떨어져서 우리는 고요한 정원을 거닐며 전날에
치룬 태풍을 잠재웠다.
수녀님들의 자상한 배려로 천국에서 달콤한 잠을 잔
후에 새소리 따라 천연의 오솔길로 들어섰더니 사슴도 자리를 비켜 주었다. 우리는 가슴의 문을 열고 천천히 삶의 짐을 내려놓았다. 나무와 물과 구름을 따라온 미풍에 두
여자의 닮은꼴 세상살이의 고뇌는 흩어졌다. 가슴을 비우니 영혼이 가벼워졌다. 뒤이어 신성한 숲의 정기가 우리의 영혼을 하나로 묶었다. 잠시지만 옛 친구와 땅위의 천국에서
축복을 나눈 소중한 기회는 딸을 결혼시키며 가졌던 행복한 보너스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