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봄에 일어난 일이다. 남편이 며칠동안 나를 괴롭혔다. 그의 돈 1만 달러가 든 봉투가 없어졌다며 나를 다그쳤다. 현금 100달러와 20달러짜리 지폐가 섞인
1만 달러는 누런 봉투속에 들어있었다면서 내놓으라고 했다. 남편은 떼쟁이가 되어서
밤낮으로 나를 들볶았다.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고 월급쟁이 월급은 바로 은행에 들어가는데 무슨 현금을 베개밑에
감출것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나 몰래 모은 그의 비상금이었단다.
집안을 뒤집어서 돈을 찾으면 반씩 나누어 갖겠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싫다고 했다. 그리고 절대로 자기의 물건에
손을 대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후 다그침을 받을적마다 혼자서 부자되어 잘 살아보라고 대응했다.
남편은 자다가도 일어나서 그의 책상과 집안을 여기저기 뒤적였고 나는 모른척 외면했다. 그러다 어느 날 출근한 남편이 전화를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언젠가 그 돈을 은행에 입금시킨
기억이 떠올랐단다. 그는 나를 괴롭힌것에 대한 사과 한마디 없이 전화를 끊었다. 1만 달러의 행방을 추궁받은 오욕은 씁쓸하게 나의 입안에 남았다.
어머니날 무슨 선물을 원하느냐고 묻던 남편더러 나에게 100달러와 20달러짜리 지폐가 섞인
1만 달러를 누런 봉투에 넣어서 달라고 했다. “미쳤니?” 하며 눈총을 주던 남편에게 누런 봉투가 필요하면 제공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어머니날이 가까워지자
여러번 그 요구를 상기시켜 주었다.
어머니날 두툼한 누런 봉투를 기다리는 나에게 남편은
얄팍한 분홍색 봉투를 내밀었다. 카드 안에는 현금
100달러 지폐가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눈으로 질문을 했더니 자세히 보라고 했다.
테이프에 붙여진 지폐의 100이라 프린트된 숫자옆에 동그라미가 2개 보태어져 있었다. 1만 달러를 준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남편은 짓궂은 개구쟁이였다.
우스웠던 사실은 쌕쌕거리는 나에게 딸이 보탠 말이다. 1만은 분명 받았잖느냐고.
달러가 아니라 센트지만. 아버지와 딸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날이 가까워오자 남편이 노골적으로
주문했다. 멀쩡한 델 컴퓨터와 노트북을 가진 남편은 아버지 날의 선물로 애플사의
신형 27인치 화면의 아이맥 컴퓨터를 갖고 싶다고 졸랐다. 이때다 싶어서
복수를 했다. 카드에 신형 27인치 아이맥의 사진을 붙여서 주었더니
남편은 씩 웃고 지나갔다. 그후 우리 부부는 딸 결혼식과 손님치레로 한동안 바빴다.
월 초에 집으로 커다란 박스가 배달되었다. 남편이 주문한 신형 아이맥 컴퓨터였다. 한번 갖고 싶은 장난감은 아이처럼 꼭 가져야하는 남편이다. 매일 출근하고 또 저녁마다 여러
모임에 다니던 남편은 바빠서 아직 컴퓨터 박스를 열지 않았다. 냉대를 받은 컴퓨터 박스는 응접실 구석에 근
한달째 밀려있다.
그러다가 이번 주에 다시 커다란 박스를 배달받았다. 상자밖에 쓰인 글씨는 그것이 다른 회사 제품의 컴퓨터임을 알려주었다.
배달원이 내민 쪽지에 사인하며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건 무슨 일인가?
한달에 컴퓨터를 두 대나 주문한 남편의 의도가 무엇인지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았다. 애초에 1만 달러가 없어졌다고 남편이 소동을 피웠을 적에 그의 정신상태를 검진 받았어야 하지
않았을까? 퇴근해서 온 남편더러 낭비한다고 지적하니 봉사활동 하는데 모두 필요하다며 우겼다.
하기는 노인행세 하면서 의기소침 하는것 보다는 무엇인가 꾸미는 자세가 보기에는 좋다.
살면서 갖는 기억을 더러 잊어버리고 또한 더러 떨어뜨리며
사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 1만 달러 분실의 소동은 웃고
지나갔다. 하지만 컴퓨터 사재기는 묵인하기 조금 힘든다. 남편의 얼굴색에
변화가 있거나 눈빛이 조금 달라도 전전긍긍하는데 이제는 행동까지 지켜봐야하니 내 일거리가 늘었다. 이런 상황에
대응할 방안을 구하려고 생각을 가다듬어 보지만 뾰죽하게 떠오르는 묘안이 없다.
내 정신의 온전함을 위해서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을
택했다. 그리고 이왕 나이에 따른 변화에 적응해서 함께 변하면서 살겠다고
각오했으니 얌전히 줄선 컴퓨터 박스들을 처리해야 겠다. 우리는 비록 불협화음을 만드는 부부지만 서로 의기투합해서
산다. 가구점에 들러서 남편이 새 컴퓨터들을 올려 놓고 놀 수 있는 긴 테이블을 찾아주어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