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놓고 기다리는 동안 눈을 부볐다.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의식이 부수수 했다. 엘리베이터 맞은편 테이블위 꽃병에 꽃힌 화사한 꽃들이 조금씩 맑아지는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가을의 정감을 주는 싱싱한 붉은 국화꽃들 사이에 분홍색 카네이션 몇 송이가 섞였다. 꽃말이
사랑을 표현하는 꽃들에 미소를 지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호텔 로비를 지나자 쇼핑몰 내부의
진부한 공기가 희미하게 흐느적거렸다. 이른 새벽의 맑은 공기를
꿈꾸며 심호흡을 했다. 자켓 주머니에 손을 푹 밀어 넣고 철창을 내린 가게들로 썰렁한 몰 내부를 시계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은은하게 퍼지는 쇼핑몰은 한 두사람, 나처럼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을 조용히 흡수했다. 앨라배마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버밍햄을 방문하면
쇼핑몰의 일부인 호텔에 묵기를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새벽에 가지는 여유이다.
전날 손님들로 붐비던 가게들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새벽에 몰을 걷는 사람들은 대충 나이든 사람들이다.
몰 내부는 기후에 영향을 받지 않고 또한 북적이는 젊은 사람들에 부딪치지 않고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걸을수 있는
좋은 운동장소이다. 어쩌다 80이 넘은 노부부가 손을 잡고 걷는 다정한
모습을 보면 데이트하는 청소년들을 보는것 보다 훨씬 가슴이 설렌다. 스카이라잇으로 어둠이 빠르게 걷힘을 보면서
몰의 윗층을 한바퀴 돈 후에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가게에 진열된 상품들을 보니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스타일과 유행이 낯설었다. 현 세대의
가치관을 들여다 보며 삶의 양상이 확연하게 바뀐것을 느끼니 이방인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게마다 앞세운 상품들에
호기심이나 갖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세태와 떨어져 사는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가는 가게의
유리벽에 반영되었다.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된 코너를 지나 커피향이 은은한 가게앞을 지나갔다.
유일하게 문을 연 커피숍이 외로워 보였다.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걷자며 나 자신을 재촉하니 한쪽 무릎이 거북스럽다며 반항했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언니가 부작용으로 발이 많이 부었다. 걷는 것은 고사하고 서기도 힘들다는 언니의 음성이 걸음을 떼어놓을 적마다
나의 의지대로 따라주는 다리를 인식하게 한다. 지나온 세월 나의 몸무게를 버티며 가고 싶은 곳이나 가야할
곳들로 안전하게 데려다준 다리다. 제발 삐걱이지 말아라 무릎을 달래며 마음으로 몸을 조절하려고 노력했다.
참으로 많은 길을 걸어왔지만 앞으로 더 많은 길을 걸어가고 싶으니 애걸할수 밖에 없다. 사람의 간사함이다. 가졌을 적에는 의식하지 못하고 살다가 잃어버리면 그 본질을 따갑게 인식하며
아쉬워하는 속성이다.
본래 운동신경이 둔하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격적인 운동으로 고통을 받았던 것은 나의 적성에 어울리지 않는 군에
입대하면서 였다. 신체훈련을 받는 동안 매일 늘어가는 운동의 양에 적응하느라 무척 힘들었다.
다행히 그당시는 젊음이 따라 주었다. 군에 복무하는 동안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정기적인
운동을 했지만 퇴직후 그 버릇을 버렸다. 그동안 운동한 투자로 건강을 유지하리라 믿었던 착각에서 깨어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요즈음 혈압을 내리고 건강을 지키느라 기회 있을적마다 꾸준히 걷는다.
그리고 쇼핑몰 내부를 걷는 것은 이웃을 걷거나 자연의
오솔길을 걷는 것과는 다른 침착함을 준다. 시선이 주위 환경에 분산되지
않으니 집중이 잘 된다. 우습지만 생활의 소음이 끼여들지 않는 몰의 실내에서 생활의 건더기가 더 잘 걸려진다.
걸으면서 나를 둘러싼 소소한 문젯거리를 머리속에서 해부하고 그리고 쉽게 이해한다. 간단히 해결할수 있는 대응책도 여러가지 찾아내고 앞으로 해야할 일들과 미처 하지 못한 일들도 분명히 윤곽이 잡힌다.
한 시간을 걷고나서 호텔로 돌아와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정면에서 나를 맞아준 것은 여전히
상큼한 국화와 카네이션이었다. 꽃들이 “사랑합니다” 하고 반기는듯 했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서 보냈던 여름이 나의 살아온 발자취되어 길게
방으로 따라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