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추워서 집안에 꽁꽁 숨었다. 따스한 남부에 오래 살았더니 피부가 얇아졌다. 그러다보니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도 속까지 얼어붙어서 정상적인 활동을 못한다. 아무리 두터운
옷을 겹겹이 입고 나가도 내 속의 추위는 여전해서 추운 날은 아예 외출을 못한다. 오늘은 남부에 낯선 싸라기눈이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다가 집안을 서성이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다.
집안 곳곳에는 지나간 세월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준
흔적들이 널려있다. 월급의 반을 여행비로 사용하면서
찾아갔던 많은 낯선 나라와 지역들에서 사갖고 온 기념품들이다. 나의 삶을 살찌운 물건들을 집으면 그것에 얽힌
사연이 떠오른다. “그때 그곳에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미소가 저절로
나온다. 그리고 딸 방의 옷장위에 가지런히 서있는 목각인형들을 보며 나는 과거로 걸어 들어갔다.
오래 전 독일에 근무하는 동안 베를린을 여러번 방문했다. 사촌 오빠네가 그곳에 살던 덕분이었다. 두터운 콘크리트와 철망이 쳐진 베를린 장벽이 삼엄하게 두 사회를 단절시킨 시절, 베를린의 상황은
가혹했다. 사촌오빠는 서베를린의 명소를 골고루 데리고 다니며 역사교육을 시켜 주었다. 베를린 올림픽때 손기정 선수가 뛰었던 운동장과 장벽을 넘으려다 사살된 사람들을 기리는 꽃과 나무 십자가들이 세워진 장소,
특히 ‘체크 포인트 챨리의 기념관’은 아직도
선명하다.
동베를린을 탈출하려 했던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담이
증언되어 있던 작은 기념관은 불가사의한 인간의 집념으로 가득했다. 자유를 찾던 끈질긴 시도와 저항의 사연들에는 가슴을 울리는 섬뜩함이 있었다. JSA와 판문점을
들락였던 한국근무를 마치고 발령받아 간 독일에서 나는 다시 강대국과 이념의 분단에 마주쳤다. 그러니 피해지였던
베를린의 상황에 특별히 민감했고 보는것마다 강력한 인상을 받았다.
한번은 장벽 건너의 환경에 호기심이 일어서 미군부대에서
주선하던 동베를린 관광에 사인했다. 관광에 나선 외국인들
중에 섞인 나같은 미군들은 이름표를 뗀 군복을 입어야 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동서 베를린의 유일한 통로였고
분단의 상징적 장소인 ‘체크 포인트 챨리’를 통해서 동베를린으로 건너갔다.
철망으로 나누어진 두 사회를 오가는 사람들을 감시탑과 검문소에서 무장한 군인들이 철저하게 검열했다. 살벌한 분위기라 솔직히 두려움도 컸지만 나는 젊었었다.
운하 옆으로 고풍스런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선 고도시
동베를린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 이었다. 히틀러가 생을 마친 벙커를
지나 그의 정권이 항복증서에 사인한 기념관을 둘러 보았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었다. 또한 구소련이 동베를린을 장악한 상황에 어울리게 일정에는 아들을 잃고 통곡하는 ‘마더 러시아’
동상이 입구에 있던 소련군의 묘지 방문도 있었다. 낯선 지역에서 낯선 사람들속에
섞여 다녀도 혼자의 외로움을 못 느낄 정도로 흥분했던 시간이었다. 마지막 방문지는 관광객들을 위한 쇼핑가였다.
그곳에서 ‘마트로시카’ 라는 목각인형을 처음
보았다. 선명한 페인트로 그림이 그려진 계란형의 목각인형은 허리부분을 비틀어서 열면 그 안에 사이즈가 다른
인형들이 줄줄이 나와서 무척 신기했다. 깊은 속에는 새끼손가락 보다 작은 앙징스런 아기 인형이 숨어 있었다.
그날 민속 이야기가 그려진 마트로시카 목각인형을 여럿
사왔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색깔하나 변하지 않고 나를 마주보는 인형을
보니 처음 가졌던 인상이 되살아났다. 구소련의 토속 문화를 지키며 어른이 아이들을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따스함은
여전했다. 지나간 세월의 햇 수를 헤아리니 우리집에 온 지 30년이
지났다. 자신을 닮은 아이들을 차례로 세워놓고 조용히 서 있는 어른 인형의 자세는 찰스 디킨스 시절에 시간이
멈추어선 듯한 느낌이 들게했다.
그리고 인형은 나 보다 복이 많았다. 아이들을 통해서 나 자신의 내부를 둘러보게 하던 시절은 나를 지나갔다.
딸들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포용하고 사랑하던 나는 딸들을 키워서 떠나보냈다. 나의
비어있는 속에서 허전한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삶의 순환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하며 살리라 마음먹으며 아기
인형부터 차례대로 제자리를 찾아 넣어주었다. 아이들을 모두 품고 배가 든든한 러시안 목각인형의 어미가 소박하게
웃음을 삼키고 있다. 고맙다고 인사하는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