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불꼬불 지렁이가 기어가는듯 이어지는 필체가 사랑스럽다. 아이의 여린 마음이 노란 노트장 위에 꽃이 되어 두둥실 떠다니는 착각을 한다. 지우개로 반쯤 지우다만 흔적 위에 연필로 여러번 되새긴 글씨는 마치 두터운 나무등결같이 든든하다. 전자 메일에 익숙하다가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손으로 쓴 편지에 곁들인 크레용으로 그린 귀여운 그림에 사로잡혔다.

 

작년에 받은 편지가 떠올랐다. 또박또박 쓴 글씨는 스폰서에게 보낸 예의 바른 인사였다. 반듯한 글씨처럼 내용도 조리있고 분명했다. 누가 써주었던 작년의 편지와 달리 이번은 모헤사가 직접 썼다. 초록색 히잡을 쓴 얼굴에 무엇인가를 찾고 있던 그 아이의 유독 큰 눈이 떠올랐다. 수줍은 웃음을 담은 모헤사의 편지를 읽으면서 아프간 지방어인 다리어와 파슈토어 외에도 영어와 아랍어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함께 읽었다. 영어가 제법 모양새를 내듯이 다른 언어도 진전이 있을 터라 흐믓했다. 모헤사는 자불리교육센터에서 교육을 받는 초등학교 여학생이다.

 

2009년 카불에 있는 미국대사관에서 큰딸이 잠시 근무할 적에 만난 한 여자와 인연을 맺었다. 아프간 출신 미국인 라지아 잔 (Razia Jan)이다. 라지아는 1970년 미국으로 이민 와 메사추세트의 소도시에서 양복점과 세탁소를 운영하고 로타리클럽 멤버로 봉사하며 살았다. 어느 이민자나 다름없이 미국사회에 적응했던 그녀의 안정된 삶은 9.11 테러 사건을 계기로 전환기를 맞았다. 그녀는 우선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에서 일하던 최초 대처자들을 위해 이웃들과 함께 담요 400장을 만들어 전달했고, 아프간으로 떠난 군인들을 위한 위문품과 아프간 아이들을 위해 신발 3만 켤레를 모아 전달했다. 그녀는 무엇인가 돕고 싶었다.

 

2002년 그녀는 모국인 아프간을 찾아가서 그녀의 목적을 찾았다. 1996년 정권을 장악한 탈리반이 여성의 교육을 불법화시킨 바람에 여아들을 위한 교육제도가 없었고 계속해서 이어지던 여러 전쟁으로 황폐한 아프간 사회에서 여성들의 삶은 참혹한 상황이었다. 보태서 여자아이는 9살이 되면 결혼을 시킬 수 있는 아프간 풍습에 따라 아이들은 성인이 되기 전부터 가정일에 혹사당했다. 아이가 아이를 낳으면서 되풀이되는 가난하고 무지한 삶의 굴레가 이어지는 상황을 목격한 라지아는 여성들의 삶을 바꿀 방안을 궁리했다. 그녀는 지역인들의 사회적 관습을 변화시키고 교육을 통해서 여자 아이들에게 힘을 돋우어 주기로 작정했다.

 

라지아는 2005년 ‘Razia’s Ray of Hope’비영리단체를 설립하고 활발하게 교육기금을 모았다. 그녀의 취지에 동조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한 미국과 아프간 후원자들과 함께 카불에서 동북쪽으로 30마일 거리에 있는 폐허가 된 옛 남학교 건물을 구입해서 복구시켰다. 그녀는 지역 부모들을 설득해 학생들을 모아서 마침내 2008년 3월 ‘Zabuli Education Center for Women and Girls’ 학교의 문을 열었다. 풀뿌리 교육의 시작이었다. 아프간의 미래를 바꿀 이 학교는 여아들에게 희망의 빛으로 우뚝 섰고 가난한 집안의 4세에서 22세 사이의 여학생들은 45분 이상을 걸어서 등교하며 자신의 삶을 바꾸는 꿈을 키운다. 그후 학생들이 받는 교육이 가족과 사회에 조금씩 영향을 끼치면서 지역인들도 학교의 발전을 돕게 됐다.

 

여성의 권익 확보에 쏟는 라지아의 열정은 아프간에서 흔히 말하는 ‘여자들은 가정과 무덤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관념을 바꾼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며 빛을 찾아 노력하는 라지아 잔같은 사람들로 아프간은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부신 활약은 역시 인간애를 중시하는 미국인들의 존경과 선망을 받는다. 2012년 CNN은 그해 ‘미국의 영웅 10인’에 라지아 잔을 선정했다. 그녀는 미국에서 뒷받침해주는 재단멤버들의 든든한 협조하에 미국과 아프간을 오가며 인도주의 활동과 학교운영에 겸해서 기금모금까지 활발하게 한다.

 

자불리교육센터는 625명의 여아들에게 K-12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교복과 신발, 코트, 식사까지 제공하고 올 3월에는 근처에 졸업생들과 지역 여성들에게 미드와이프 역의 의료기술을 교육시키는 ‘Razia Jan Institute’를 개설했다. 좌절하지 않고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며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는 교육의 영향을 보면서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속담을 믿듯이 아프간 여성들의 밝은 미래를 믿는다. “훗날 누군가를 돕는 삶을 살고 싶다”는 모헤사의 미래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