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들어서며 부모가 좋아하는 꽃을 준비한 딸의 배려에 고마웠다. 커다란 꽃병에서 내가 좋아하는 해바라기 꽃들이 수국과 장미를 당당하게 제압하는 정경에 슬그머니 미소가 나왔다. 태양을 닮은 꽃의 뜨거운 열기가 반갑게 맞아줬지만 선뜻 신발을 벗지 못했다. 으르릉거리며 다가온 개 때문이다.

 

워싱턴DC 중심가에 있는 딸의 집은 고옥을 개조한 콘도이다. 교통은 편리하지만 평수가 적다. 사람 살기에도 좁은 공간에 커다란 개가 함께 살고 있으니 개와 친하지 않으면 집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한다. 벌써 여러번 보았지만 매번 우리를 낯설어 기피하는 개다. 내가 주인의 엄마임을 강조하고 기억력이 나쁜 개라고 꾸짖어도 아랑곳없다. 텃세를 부리는 개는 딸내외가 끔찍이 사랑하는 자식같은 애완동물이고 바로 나의 개손자다.

 

요리를 잘하는 사위는 부엌에서 바쁘고, 딸은 거실 한쪽에서 개를 어르고 달래느라 바쁘다. 엉거주춤 소파에 갇힌 우리 부부는 주인보다 개의 눈치를 봐야하는 사실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날카롭게 지켜보는 개가 솔직히 두려웠다. 개는 한곳에 가만히 엎드려 있다가 우리가 움직이면 불쑥 일어나 으르릉거렸다. 딸과 사위가 핀잔을 주어도 우악스런 큰 입을 벌리고 입안에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보였다.

 

몇 년 전 노스케롤라이나 어떤 지역에서 구제된 애완동물들이 워싱턴DC로 와서 새 주인을 찾았다. 임시 보호자의 손을 잡고 거리에 선 동물들 중에 7개월쯤 되었다는 큰 개가 지나가던 딸의 발에 그의 앞발을 올렸다. 사람이 개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개가 주인을 선택했다. 딸내외는 애처롭게 바라보던 개를 거부하지 못하고 집으로 데려왔다. 예상밖의 일이었다. 미국산 대형견인 플롯 하운드와 복서의 잡종인 개손자를 처음 본 것은 4년 전 미네소타에 온가족이 크리스마스 휴가차 모여서다. 커다란 갈색눈이 유난히 슬퍼보였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못했다. 처음 만났을 적부터 개는 어느 누구도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했고 다른 가족들도 사람을 경계하던 험상스런 개를 꺼렸다.

 

어릴적에 받은 상처가 깊어서 정서적으로 불안했지만 주인의 사랑을 받으면 안정되고 상처도 치유되리라 봤다. 세월이 지나면 여느 개처럼 가족을 따르고 사랑을 나누리라 믿었다. 그리고 누구와도 쉽게 적응할수 있으리라 봤다. 그러기 위해서 딸내외는 개를 데리고 가서 복종훈련을 함께 받았다. 사람과 동물의 교제를 배우고 인내심을 가지고 매일 열심히 연습했다. 훈련을 마치고 테스트를 통과한 개는 학사모를 쓰고 사진을 찍었다. 덕분에 성품은 조금 온순해졌지만 행동은 여전했다. 주인은 절대적으로 따랐으나 타인에게는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딸네가 이 개를 입양한 후로 우리는 워싱턴DC를 방문하면 무서운 개를 피해서 호텔에 묵었다. 하지만 작년 12월 노스케롤라이나 캐빈에서 일주일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 익숙해진터라 이번에는 딸집에 묵기로 했다.

 

주인으로부터 단단히 훈계를 받은 개는 우리를 묵살하고 우리도 개를 피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니 조금 나아졌다. 오늘은 창가에 앉아있는 내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개가 나의 앞과 뒤를 돌며 체크하는 동안 나는 꼼짝하지 않고 기다렸다. 딸은 멀찍이서 우리를 지켜봤다. 안전하다고 느꼈는지 개는 가까이 앉았다. 나를 주시하는 개의 슬픈 눈빛에 연민이 우러난다. 주인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벗지 못하는 개의 모습이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슬픈 노인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깊은 눈동자속에 잠긴 비밀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다.

 

서로 마주보며 무언의 대화를 나누니 개의 귀가 바쁘게 움직인다. 이 개는 특히 귀로 감정표현을 잘한다. 작은 소리나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바람에 조심스럽게 무릎으로 다가가 좋아하는 간식을 주니 슬그머니 받아 먹는다. 하지만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고 개의 머리위로 절대로 손을 올릴수가 없다. 신경이 날카로운 개손자의 비위를 맞추며 우스운 비교를 한다. 딸내외가 개를 입양한 지 벌써 4년이 지났다. 아이를 입양했다면 한참 재잘거리며 껴안기고 소란을 피울 나이다.

 

동물인 개가 어릴적 상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함을 보니 마음이 아프다. 도무지 어떤 학대를 받았길래 그 상처의 후유증을 오랫동안 앓는지 안스럽다.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아이는 3살이되면 모든 성품이 형성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어릴적 체험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에도 진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가진 개손자와 어렵게 사귀면서 바램이 있다. 다음에 다시 만날적에는 으르릉거리지 않고 반갑게 꼬리를 흔들어 주었음 좋겠다. 그리고 해바라기를 닮은 밝은 표정으로 맞아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