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남부의 목화농사는 풍년이다. 시골길을 지나다 목화밭을 보고 차를 세웠다. 넓은 대지를 뒤덮은 하얀 신비에 도취되니 컨트리 그룹 앨라배마가 부른 ‘High Cotton’ 멜로디가 부드럽게 목화밭에 일렁인다. 만개하여 퍼트러진 목화솜의 풍성함이 남부인들의 삶으로
친근하게 가슴에 안긴다. 농업이 위주였던 남부 역사에서 선조들은 목화농사의 성패에 따라 웃고 울었다.
건조하고 더운 남부의 날씨에 잘 자라는 목화를 재배한
것은 개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부 주들은 주로 목화농사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고 도시가 발전되었다. 목화농사의 번성에 따라 교통도 발전했다. 곳곳에 있는 지역 ‘목화 기념관’에서는 남부 최대의 농산물로
왕노릇을 했던 목화와 지역의 변천사를 본다. 세월따라 개발한 다양한 목화의 종류와 재배 기록에는 전시대 사람과
사회의 노고가 함께 점철되어 있다. 더불어 도전이었던 자연재해와 목화농사의 파멸을 몰고온 곤충이 조명되어
있다. 그러나 아직도 목화농사를 일구는 농부들의 끈질긴 정성에서 전통 농업의 맥락을 느낀다.
목화밭을 보면 또한 어릴적에 배운 훌륭한 위인이 떠오른다. 중국을 방문하고 귀국하며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대에 숨겨서 들여왔다는
고려시대의 학자 문익점이다. 목화의 재배와 보급에 기여해서 의생활을 개혁시켰다는 그의 충정과 애국심의 실적은
어린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먼 낯선 세계와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심을
심어주었고 본 적이 없는 목화밭의 신비를 느끼게 했었다.
심호흡을 하고 끝없이 펼쳐진 땅위의 눈송이들을 본다. 가슴이 따스해지고 마음이 순해진다. 소박한 마음이 되니 상념이 없어진다. 알알이 맺혔다가 터져 벌어진 작은 뭉개구름같은 솜들은
진실로 신비롭다. 부드러움에 끌려서 손안에 목화솜 한 덩어리를 살짝 쥐어본다. 갓난 아이의 피부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씨들에는 손을 찌를듯한 날카로운 부분이
있다. 몇 년 전 ‘북 페스티벌’에서 만났던 흑인작가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만개한 목화밭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목화솜을 수확하는
흑인들을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것을 보고 “푸근한 정서를 느낀다” 했다가 나는 그로부터 찬물 세례를 받았다. 60이 넘은 그는 아직도 그런 그림을 정면으로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목화밭에 노예로 얶매여
살았던 선조들의 그림은 아픔이었다. 그들의 비애는 “죽어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인간성이 말살된 환경에서 동물 취급을 받으며 살았던 조상들의 한스런 삶이 자신의
피속에DNA로 남아 있다는 그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남부역사에 민감하지 못했던 이민자의 허술함을 사과했다.
전에는 목화농사의 그늘을 느끼지 못했다. 목화 기념관에서 보지 못했던 미국역사의 오욕인 노예제도를 흑인작가가 일깨워
주었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목화밭의 얼굴이 다름을 알게된 후부터 낭만적인 감상에서 조금 벗어났다.
사람의 손으로 목화솜을 수확했던 과거를 생각하며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여러번 해보았다. 아찔했다. 해가 뜨기 전부터 해가 진 후까지 계속해서 알알이 맺힌 솜을 수확했던 옛사람들의
고난은 요즈음 목화를 수확하는 기계가 후다닥 대신한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남부의 목화농사는 계속될 것이다. 흙에서 태어난 따스한 목화솜 덩어리가 과거의 아픔을 덮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속을 연민과 사랑으로 채워주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