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다음날 열차로 스페인
동북부에 있는 도시 팜플로나로 향했다. 수학여행을 떠나는 아이처럼
설레며 도착한 팜플로나는 비가 내렸다. 굵은 빗줄기에 “어쩌나” 하며 역사를 나서니 택시와 시내버스가 있었다. 혼자여서 대중속의 안전을 찾아 버스를 선택했다. 스페인어로 한 남자와 대화하던 나처럼 배낭을 멘 여자에게 “버스비가 얼마인지 아느냐?”
고 영어로 물었더니 그녀가 현지인 남자에게 물어서 알려주었다.
버스에 올라 배낭을 멘 여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다운타운에 있는 호텔로 간다고 하니 그녀는 생장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러 간다고 했다. 충동을 받았다. 산이 없는 남부에 오래 살면서 등산할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순례길’의 시작 지역인 프랑스 남부 생장 피데 포르 (생장)에서
피레네 산을 넘어야하는 구간은 애초부터 포기하고 팜플로나에서 순례 (까미노)를 시작할 계획이었다.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다섯 정류장을 지나야하니 그때까지 생각해 보라” 고 낯선 여자가 유혹했다. 버스가 두 정류장을 지나자 “나도 생장 가겠다” 고 나섰다. 나의 까미노는 시작도 하기전에
예기치 않은 변전을 했다.
버스가 피레네 산을 구비구비 어지럽게 돌면서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넘어갔다. 스페인에서 태어나서 아르헨티나에서
성장하고 결혼후 미국으로 이주해서 현재는 플로리다 남단에 사는 블랑카는 나의 첫번째 동반자가 되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순례길을 걷고자 온 생전 처음 만난 여자와 오랜 친구처럼 재잘거렸다. 까미노의 묘미다.
한국 사는 친구와 작년처럼 순례길 나선 줄 알던 남편은 “친구와 잘 만났느냐?” 고 물었다. 함께 사진을 찍어 보내라는 주문에 마드리드 시가지 사진을 보냈다. 혼자 간것을 알게된
남편은 노발대발했다. 작은딸에게 “당장 가방을 사서 스페인 가라” 며 호통을 쳤다. 불이 난 전화기는 꺼버렸지만 블랑카를 만나며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남편에게 보내 안심시켰다. 다음날 이른 아침, 오레곤주에서 온 제임스가 우리와 합세했다. 성녀 블랑카와 성인 제임스의 이름을 가진
새 친구들에 든든하게 둘러싸여서 생장을 출발했다. 아름다운 시작이었다.
순례에 나서면서 ‘내면으로 들어가자. 나를 찾자. 그리고 신앙여정으로 영적 성장을 거두자.’ 의도를 가졌다. 흥분과 호기심에 부추겨서 장기간 일정이 두렵지 않았다. 매일 배낭을 메고 걷는 일이나 숙소를
찾고 식사를 해결해야하는 문제도 걱정하지 않았다. 상황따라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2일째 되던 날, 계속되는 산길에 지친 블랑카가 중도에 멈췄다. 4일째는 무릎이 약한 제임스가 하루 휴식해야 겠다며 뒤처졌다. 혼자 걷다가 영국에서 온 자매, 린다와 조안을 만났다. 치마를 입고 배낭을 멘 린다는 걸음이 무척 빨랐다. 그리고 만난 애리조나주에서 온 이봔은 순례길을 5번째로 걷는 유경험자로 정보통이었다. 계속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고 며칠 후 다시 만나 반갑게 해후하며 나의 신앙여정은 본격화됐다.
어둑한 새벽에 숙소를 나서면 맞아주는 상큼한 기운은
발걸음을 가볍게 해줬고 산등성이나 지평선에 장엄하게 떠오른 해는 하루를 버틸 에너지를 줬다. 신에 감사하는 기도로 시작한 하루에 8시간 이상 기도하고 노래하며 걷는 동안 시간과 공간의 온전한 자유를 즐겼다. 그리고 지나는
마을마다 심장인양 중심에 선 교회의 십자가에 고개숙였다. 길안내하던 하얀 나비따라 산길이나 돌길, 들판에 나의 흔적을 남기지 않고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다. 자연의
생기를 받으며 투박한 산야의 아름다움에 마취되어 가는 시간이 길어지자 단순한 일상에 몸은 단련되어 갔고 마음은 평안했다. 하늘과 땅 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자연의 성소인 세상이 좋았다.
나의 까미노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체험이었다. 인터넷이나 책자에 실린 까미노의 정보는 단순한 포장지이다. 직접 배낭을 메고 순례길에 나서면 걸으면서 속 내용을 하나씩 만난다. 걷고 먹고
자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순례자들과 유대감을 가진 작은 사회를 형성한다. 단순한
1차원 세상이지만 복잡미묘한 인간의 본능이 솔직하고 초연하게 실체를 보인다. 산티아고로
찾아가는 길은 기적을 일궈낸다. 슬픈 사연을 가진 순례자들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되고 그들의 소망이 나의 소망이
되었다. 혼자라도 혼자가 아닌 ‘우리’ 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