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들이  ‘까미노의 바이블’ 이라 부르는 책자는 영국인 존 브리얼리 (John Brierley)가 쓴  ‘산티아고로 가는 길 (Camino de Santiago)’이다.  여러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모든 지역 정보와 지도를 가진 완벽한 안내서로 매일 걷기에 적당한 구간을 설정했다.  나는 이 책을 배낭앞에 넣어다니며 제안한 지역보다 사람들이 적게 멈추는 중간의 한적한 마을 숙소를 선호했다.  

열흘째 되던 날,  정신없이 30 킬로미터 이상을 걷다보니 지쳤다.  신발을 벋고 싶었고 샤워를 하고 싶던차에 순례자들외에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듯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카페에서 숙소를 물었더니 맞은편 성당을 가리켰다.  성당뒤 입구는 동굴처럼 어둑했다.  돌계단을 돌아 올라가니 봉사자가 맞아 주었다.  넓은 홀의 한쪽에는 체조매트들이 잔뜩 쌓여 있고 벌써 몇 사람은 매트위에 누워 쉬었다.  색다른 정경이었다.  나도 매트를 하나 들고 벽가까이에 자리를 잡았다.  땀과 먼지로 범벅된 몸을 씻고 나서니 봉사자들이 3층 부엌에서 직접 만든 다양한 타파스 음식을 펼쳐놓은 테이블로 초대했다.  우루루 몰린 순례자들은 앙징스런 음식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허기진 순례자들에게 타파스는 진수성찬이었다.

아름다운 성전을 가진 마을 교회의 저녁미사는 엄숙했다.  마을 사람들이 많이 참여한 미사 후에 신부님은 특별히 순례자들을 축복해주셨다.  다시 3층으로 올라가 봉사자들이 준비한 저녁상을 받았다.  좁은 공간에 비집고 둘러앉은 순례자들은 어깨를 맞대고 맛난 음식과 와인을 나누며 왁자지껄 행복한 교제를 했다.  서로 도와 설거지를 한 후 비밀통로를 지나 성전으로 갔다.  촛불이 밝힌 성전의 뒷편은 신비스러워 현실감을 잃었다.  둘러앉은 순례자들의 표정을 가린 옅은 어둠속에서 돌아가며 간단한 자기소개와 까미노를 하며 성찰한 느낌을 나누었다.  국적과 배경이 다른 20대에서 70대의 남녀노소 40여명 순례자들이 털어놓는 진솔한 깨우침은 감동이었다.  가슴과 가슴의 교류에 촛불이 함께 흔들렸다.

그 며칠 후다.  눈부시게 영근 포도밭을 지나고 고개숙인 해바라기밭을 지나 언덕을 넘고 다시 끝없이 이어진 들판을 걸었다.  시간의 흐름이나 서쪽으로 해가 기우는 것도 잊고 걷는 일에만 집중한 그날도 많이 지쳤다.  눈앞에 아지랑이처럼 들판에 홀로 선 직사각형 돌건물이 나타나서 힘을 내어 다가갔다.  열린 문 안에는 몇사람이 앉아 대화하고 있었다.  가까운 숙소를 물었더니 한 남자가  “여기서 묵어라” 며 침대가 몇 있는 구석을 손짓했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모두 남자여서 감사하지만 사절하고 나왔다.  문앞 의자에서 잠시 쉬는데 며칠 전에 만났던 아일랜드 순례자 우나가 다리를 끌며 다가와 너무나 반가웠다.  우나와 함께 그곳에 머물기로 했다.  

예전에 교회였던 건물은 지금은 이탈리아의 중동부 도시 아스콜리피체노에 있는 ‘성인 제임스의 기사회’ 소유이다.  그곳 멤버들이 봉사와서 4월부터 9월까지 순례자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한다.  추위로 문 닫기 전에 들렀으니 운이 좋았다.  본 건물은 전기가 없지만 뒤에 건축된 샤워와 화장실이 있는 부속건물은 전기가 들어와서 좋았다.  촛불로 그윽한 분위기에서 7나라에서 온 12명의 순례자들은 술렁였다.  기사회 망또를 입은 봉사자들은 순례자를 제단이었던 곳으로 모아서 간단한 기도후 의자에 앉은 순례자들의 발을 차례대로 씻고 타월로 닦은 후 발등에 키스까지 해줬다.  상상밖의 세족식이었다.

옛 성전과 촛불,  나는 다시 흥분했다.  일부러 교회의 숙소를 찾는 브라질에서 온 젊은 커플은 여러 곳에서 체험한 이야기를 재미나게 들려 주었다.  맛있는 파스타와 샐러드,  그리고 싱싱한 과일에 겸해서 포도주를 마시면서 낯선이들과 밤 늦도록 즐기다가 침낭속에 누웠다.  마지막 촛불이 사그라지자 완벽한 칠흑에 세상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평안한 마음으로 깊은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을 먹은 후 모두 밖으로 나가 신선한 새벽의 정기를 받으며 손잡고 신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했다.  떠오르는 태양에 들판의 안개가 가라앉고 내 마음도 겸손해져서 함께 바닥에 엎드렸다.

교구에서 운영하는 숙소는 순례자들이 남기는 기부금으로 운영한다.  기부금이 많은 날은 다음날 찾아오는 순례자들에게 풍부한 음식을 대접하고,  기부금이 적은 날은 간단한 상차림이 된다.  “종교를 가졌나?”  질문은 실없다.  믿음은 각자 가슴에 가진 영적 확신이다.  예기치 않았던 숙소로 인도받고 신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한 나는 진정 축복받은 순례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