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을 향해 걸으니 해가 뜨면 장승처럼 키가 큰 그림자가 앞장섰다. 지루하지 않게 안내하던 그림자의 키는 조금씩 줄었다. 은근슬쩍 옆에 붙어서 길동무 하던 그림자가 뒤로 물러서면 다시 혼자였다. 나는 고독한 순례자였다. 꾸준히 함께 걸을 동반자를 구하지 않았다. 대부분 순례자들의 목적지는 산티아고이다. 서로 의지하고 걷는데 내가 중도에 멈추면 혼자가 될 동반자에게 미안해서다. 그래서 걸음걸이 속도가 비슷하고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나의 목적지를 밝혔다. 그저 적당히 사귀다가 적당한 지점에서 헤어지는 것으로 만족했다.

17일째였다.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와서 조심하니 다음엔 왼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아차 싶었다. 두 곳 다 예전에 여러번 다쳤던 부분이다. 부실한 신체부위가 쉬지않고 걷던 나에게 반기를 들었다. 걷는 구간을 줄여도 아픔은 여전했다. 그때부터 기쁨의 걸음이 고행의 걸음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걷기가 힘들고 되돌아 가기도 억울해서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들길에 섰다. 쿡쿡 쑤시는 발목과 무릎의 통증이 배낭을 멘 몸무게를 견디지 못했고 교통편을 구할수 있는 마을이 가까이 없었다. 버지니아주에서 온 패트릭이 멈췄다. 발에 생긴 물집이 커져 발목으로 올라가자 진료소에서 치료받고 쉬엄쉬엄 걷던 그는 자상하게 나의 증상을 물었다. 그의 아내 베스는 가지고 있던 근육 마사지 크림을 내손에 쥐어줬다. 낯선이들의 관심과 따스한 배려가 용기를 줬다. 등산스틱을 꽉 잡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비상약으로 가져간 진통제를 먹고 버티다가 발을 떼기 힘든 날 응급 진료소를 찾았다.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진료비로 70유로를 지불했는데도 크레딧카드를 요구하는 접수처 직원들과 한동안 실랑이를 벌렸다. 그리고 만난 여의사와도 난감했다. 우리는 컴퓨터에 구글 번역창을 열고 나는 영어로, 그녀는 스페인어로 타자치며 질문하고 답했다. 진찰 후 근육에 염증이 생겼다며 “한동안 걷지 말고 휴식하라”는 처방을 줬다. 걷는 까미노에 걷지 말라니 잔인한 선고다. 기운이 빠져 문을 열고 나서는 나의 등에 그녀가 “부엔 까미노”라 외쳐서 돌아보고 씩 웃었다. 그녀가 맞다. 나는 여전히 까미노를 원했다.

약국에서 처방약과 무릎 브레이스를 구해서 착용했다. 달팽이처럼 기듯 걸으니 순례자들의 행렬에서 쳐졌다. 산길에서 본 손가락 크기의 달팽이에 내 모습이 겹쳐졌다. 그러나 진정 까미노의 뒤안길에 서니 주변을 새롭게 발견했다. 소소한 정경이 눈안에 아름답게 들어왔고 부상자가 의외로 많았다. 산길과 돌길에 넘어져 뼈를 다친 사람들은 대충 포기하고 귀국했다. 그러나 나처럼 발이나 다리문제로 기우뚱 걷는 순례자들은 까미노 약인 항염증제 ‘이부프로펜 (Ibuprofen)’과 중국산 근육통 연고제 ‘타이거 밤 (Tiger Balm)’ 에 의존하고 까미노를 계속했다.

숙소에서 애리조나주에서 온 페네로페를 만났다. 졸지에 외아들을 잃은 아픔을 달래려고 아들의 재를 가져와 산티아고로 향하던 그녀는 양쪽 발뒤꿈치의 통증으로  6시간마다 진통제를 먹으며 버텼다. 그녀와 서로 의지하고 격려하며 걷다가 지치면 버스를 탓다. 병들고 지친 순례자들로 가득찬 버스안은 패잔병들의 집합같아 씁쓸했지만 서로 통증을 다스리는 묘법을 나눈 기회였다. 페네로페와 헤어지고 소파에 앉아 주춤이던 아침, 비를 많이 맞은 후 오열과 한기에 몸을 떨던 시카고에서 온 70대 남자가 옆에 앉았다. 봄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허전해서 순례길에 나섰다는 그는 나의 작은 어깨에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몸살기를 가진 그를 두고 떠날수 없어서 오전 내내 그가 깨나길 기다렸다. 간신히 기운을 차린 그가 택시로 떠난 후 나는 호텔로 가서 쉬었다.

벼르고 온 순례길이 아닌가. 은근과 끈기로 버티자고 마음을 다지며 견딜수 있는 만큼 걷고 버스로 이동했다. 그리고 찾아보고 싶은 곳은 택시로 찾아갔다. 다리의 통증을 감내하며 마침내 산티아고에 도착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퉁퉁 부었지만 지탱해준 다리가 고마웠다. 대성당의 성전에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신은 나에게 빛과 그림자, 기쁨과 고통, 모두가 온전히 내것임을 깨우쳐 줬다. 뒤쳐지는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고 앞만 보고 걷던 나에게 사람들과 손잡고 걸어야함을 가르쳐 줬다. 서로 돕고 사는 사람살이의 법도에 까미노도 예외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