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
아가의
보드라운 살갗을
따스한 목욕물이 감싸 안자
우윳빛 매그놀리아 한 송이
소담스럽게 피어나던
어느 봄날의 추억
<숨겨진>
동네 꼬마들이
우르르 몰렸다가
스르르 헤쳐지며
숨바꼭질을 한다
그때
조금 더 열심히
숨겨진 흔적과 실마리를
찾는 연습을 했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너를 잃고
헤매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물음표>
지금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나의 답변을 기다리지 말고
자신에게 먼저 물어보렴
아래의 질문에 모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아마도 너는 참 좋은 사람과 함께 있다는 걸 거야
스스럼없이 너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니?
모르면 모른다고 말할 수 있니?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니?
<다음부터>
다음부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라고
상대방을 손가락질 하기 전에
다음부터라는 말에
의지해야만 하는 그 사람의 마음을
손가락으로 꼬옥 눌러봐
아마도
그동안 쌓인 좌절의 고름이
물컹 터져 나올걸
그렇다고 역겨워하거나
무섭다고 뒷걸음질 치지 마
어쩌면 다음부터라는 말은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존귀한 생명이
스스로 희망을 불어넣는
마법의 주문일 수도 있잖아
다음부터 강해지기
다음부터 거절하기
다음부터 용서하기
다음부터 사랑하기
<여름>
이글거리는 태양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
흘러내리는 땀
끈적거리는 피부
쉽게 녹아내리는
냉커피의 얼음
하지만
여름은 '밤'이라는
최고의 반전을 품고 있는
밀당의 고수이다
시원한 공기를
밤바람이 실어 나를 즈음
하늘의 별들은
수려하게 빛나고
부엉이와 풀벌레의
서늘한 울음소리
치자꽃의
단내가 담장을 넘어
너울너울
밤을 뒤덮고 있다
<약점>
작은 점
하나도 없는
인간의 몸은
오히려 인위적일 것 같아
누군가의 부족함이
나의 숨통을
틔워주기도 하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용기를 주기도 하듯 말이야
<떠올리다>
<냄새>
아주 조심조심
종이 상자의 뚜껑을 열고
오래된 향 내음이 베인
옷감을 꺼내
한 번 쓰다듬고는
킁킁 냄새를 맡는 의식을
오늘도 행한다
할머니의 육신은
시간과 함께 사라졌지만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할머니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일렁거리는 추억
함께한 시간
평생을 두고도 갚지 못할 사랑
명치를 저미는 그리움
